민태혁(閔台爀)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BBFCD0DCD601B1746X0 |
자(字) | 자삼(子三) |
생년 | 1746(영조 22) |
졸년 | 1806(순조 6) |
시대 | 조선후기 |
본관 | 여흥(驪興)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민백종(閔百宗) |
생부 | 민백형(閔百亨) |
[상세내용]
민태혁(閔台爀)
1746년(영조 22)∼1806년(순조 6).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자삼(子三). 민백형(閔百亨)의 아들로. 민백종(閔百宗)에게 입양하였다.
일찍이 관직에 진출하여 현감을 지낸 뒤 1779년(정조 3) 정시문과에 장원급제,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거쳐 통정대부에 승차(陞差), 홍주목사로 나가 치민(治民)에 불법사례가 있었다는 암행어사 이정운(李鼎運)의 보고에 따라 파직되었다.
뒤에 다시 기용되어 1787년 동래부사‧대사간을 거쳐 전라도관찰사로 재임시 종형 민창혁(閔昌爀)의 저리부채사건(邸吏負債事件)에 연루되어 일시 관직을 잃었다.
이듬해 동지 겸 사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대사헌‧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개성부유수‧이조참판‧도승지 등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1803년 예조판서로 원접사(遠接使)를 겸하여 청나라 사신을 맞았고 공조판서로 동지사의 정사가 되어 다시 청나라에 다녀와서 좌참찬을 지냈고, 1805년 정순왕후(貞純王后)의 상을 만나 빈전도감제조(殯殿都監提調)가 되어 치상(治喪)을 맡았다.
이듬해 함경도관찰사를 거쳐 판의금부사‧우참찬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글씨에 능하였는데, 글씨로는 황강서원묘정비(黃江書院廟庭碑)가 있다.
일찍이 관직에 진출하여 현감을 지낸 뒤 1779년(정조 3) 정시문과에 장원급제,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거쳐 통정대부에 승차(陞差), 홍주목사로 나가 치민(治民)에 불법사례가 있었다는 암행어사 이정운(李鼎運)의 보고에 따라 파직되었다.
뒤에 다시 기용되어 1787년 동래부사‧대사간을 거쳐 전라도관찰사로 재임시 종형 민창혁(閔昌爀)의 저리부채사건(邸吏負債事件)에 연루되어 일시 관직을 잃었다.
이듬해 동지 겸 사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대사헌‧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개성부유수‧이조참판‧도승지 등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1803년 예조판서로 원접사(遠接使)를 겸하여 청나라 사신을 맞았고 공조판서로 동지사의 정사가 되어 다시 청나라에 다녀와서 좌참찬을 지냈고, 1805년 정순왕후(貞純王后)의 상을 만나 빈전도감제조(殯殿都監提調)가 되어 치상(治喪)을 맡았다.
이듬해 함경도관찰사를 거쳐 판의금부사‧우참찬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글씨에 능하였는데, 글씨로는 황강서원묘정비(黃江書院廟庭碑)가 있다.
[참고문헌]
正祖實錄
純祖實錄
國朝榜目
純祖實錄
國朝榜目
[집필자]
조원래(趙湲來)
대표명 | 민태혁(閔台爀) |
성명 | 민태혁(閔台爀) |
성명 : "민태혁(閔台爀)"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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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