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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윤원(朴胤源)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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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영숙(永叔)
호(號)근재(近齋)
시호(諡號)문헌(文獻)
생년1734(영조 10)
졸년1799(정조 23)
시대조선후기
본관반남(潘南)
활동분야학자 > 성리학자
박사석(朴師錫)
저서『근재집』
저서『근재예설(近齋禮說)』

[상세내용]

박윤원(朴胤源)
1734년(영조 10)∼1799년(정조 23). 조선 후기의 성리학자.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영숙(永叔), 호는 근재(近齋). 공주판관 박사석(朴師錫)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총명이 뛰어나 책을 읽으면 한번에 수십 줄씩 읽었다. 김원행(金元行)김지행(金砥行)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깊이 연구하여 학자들로부터 크게 추앙받았다.

1792년 학행으로 천거되어 선공감역(繕工監役)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였으며, 1798년 원자(元子)를 위하여 강학청(講學廳)이 설치되자 서연관(書筵官)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거절하였다.

집이 가난하여 비와 바람을 피할 수 없는 형편이었지만 끝내 벼슬하지 않고 학문연구에 전념하였다. 당시 소개되던 서학(西學)의 폐해가 도교나 불교보다도 크다고 하여 배척하고 오직 경전의 훈고와 성리학에 몰두하였다.

김창협(金昌協)이재(李縡)김원행의 학통을 계승한 적전(嫡傳)으로, 다시 문하의 홍직필(洪直弼)에게 전수하여 신응조(申應朝)임헌회(任憲晦)조병덕(趙秉德) 등으로 이어지는 조선 후기 성리학의 중요한 학파를 형성하였다. 동문의 오윤상(吳允常) 등과는 많은 학문적 논란과 교류가 있었다.

그의 성리설은 장편으로 체계를 세워 주장한 것은 없으나, 경의(經義)와 잡저에 산견되는 내용을 종합하여보면 대개 절충적 입장에서 학설을 전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심설(心說)에 있어서 심(心)은 기(氣)라고 하였는바, 『대학』 장구의 허령불매조(虛靈不昧條)의 경의를 해석하기를, 허령의 기가 심이 된다고 하여 심시기(心是氣)의 주기적 입장을 취하였다.

이기설(理氣說)에 있어서는 ‘이가 기에 앞서 존재한다(理在氣先). ’고 생각하여 주리적 경향을 보였다. 또한 예학에 관하여도 깊은 연구와 해박한 지식이 있었다.

그의 문인으로는 홍직필을 비롯, 이재의(李載毅)정도일(丁道一)어석중(魚錫中) 등 다수가 있다.

죽은 뒤에 대사헌에 추증되었으며, 저서로 『근재집』『근재예설(近齋禮說)』이 있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참고문헌]

近齋集
梅山集(洪直弼)
朝鮮儒敎淵源(張志淵)
朝鮮儒學史(玄相允)
典考文獻

[집필자]

박석무(朴錫武)
대표명박윤원(朴胤源)
윤원(胤源)
성명박윤원(朴胤源)
영숙(永叔)
근재(近齋)

명 : "윤원(胤源)"에 대한 용례

전거용례
韓史綮v2十行俱下及長好程朱學以京城膠擾□居廣陵江上潛心演□久而後返學者歸之大提學吳栽純等交薦之王□繕工監監役胤源引病不□後胤源以從妹爲王綏嬪益鞱其跡竝廢講會人問其故胤源曰身爲戚里苟欲守拙當自簡交游始而交游之廣莫如
韓史綮v2程朱學以京城膠擾□居廣陵江上潛心演□久而後返學者歸之大提學吳栽純等交薦之王□繕工監監役胤源引病不□後胤源以從妹爲王綏嬪益鞱其跡竝廢講會人問其故胤源曰身爲戚里苟欲守拙當自簡交游始而交游之廣莫如講會是以廢之
韓史綮v2返學者歸之大提學吳栽純等交薦之王□繕工監監役胤源引病不□後胤源以從妹爲王綏嬪益鞱其跡竝廢講會人問其故胤源曰身爲戚里苟欲守拙當自簡交游始而交游之廣莫如講會是以廢之
國朝人物志v3子承旨世城玄孫聰穎絶人一讀下數十行僦居廣陵江上讀書久而後返醇菴吳載純以胤源及沈定鎭薦于朝上問於金鍾秀對曰胤源以經學聞於世貧甚所居不蔽風雨常與吳允常講磨
國朝人物志v3字鳳來南潘人文肅公宗慶子出繼伯父忠翼公宗輔子庚午生員進士學禮於伯祖近齋胤源丙子文科官至判敦寧府事退處楊州村舍因念鍾鳴漏盡夜行不休古人誡也欲歸敦巖舊舍逍遙山水
國朝人物志v3字元得潘南人胤源子母夢碩果有娠故取剝之上九而命名焉受學于家庭閱耳目者不復忘未勝冠已沈潛六籍治博士業尤工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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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2010-04-06고종실록 24권, 1887년 12월 10일조를 참고하여 시호 문헌(文獻) 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