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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행(金元行)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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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백춘(伯春)
호(號)운루(雲樓)
시호(諡號)문경(文敬)
생년1702(숙종 28)
졸년1772(영조 48)
시대조선후기
본관안동(安東[新])
활동분야학자 > 유생
김숭겸(金崇謙)
생부김제겸(金濟謙)
조부김창협(金昌協)
조부김창집(金昌集)
외조부박권(朴權)
저서『미호집』

[상세내용]

김원행(金元行)
1702년(숙종 28)∼1772년(영조 48). 조선 중기의 학자‧문신. 본관은 안동(安東[新]). 자는 백춘(伯春), 호는 미호(渼湖)운루(雲樓). 김상헌(金尙憲)의 후손으로 부친은 승지 김제겸(金濟謙)이며, 모친은 밀양박씨이조판서 박권(朴權)의 딸이다. 당숙인 김숭겸(金崇謙)에게 입양하여 김창협(金昌協)의 손자로 널리 알려졌다. 일찍부터 종조부 김창흡(金昌翕)에게 배웠고, 이재(李縡)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1719년(숙종 45) 진사가 되었으나, 1722년(경종 2) 신임사화 때 본가의 할아버지 김창집(金昌集)이 노론 4대신으로 사사되고, 생부 김제겸을 비롯하여 친형제인 김성행(金省行)김탄행(金坦行) 등이 죽거나 유배당하자, 벼슬할 뜻을 버리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어머니 배소에 따라가 『맹자』『율곡집(栗谷集)』『우암집(尤庵集)』 등을 탐독하였다. 1725년(영조 1) 본가의 할아버지‧아버지‧형 등이 신원된 후에도 시골에 묻혀살며 학문연구에만 몰두하였다.

1740년 학행으로 천거받아 내시교관(內侍敎官), 1750년 위수(衛率)종부시주부(宗簿寺主簿)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고, 1759년 왕세손을 교육할 적임자로서 영조의 부름을 받았으나 상소하여 사퇴하였다.

1761년 공조참의사성(司成), 뒤에 찬선(贊善)에 임명하였을 때도 역시 사양하였다. 조선 중기의 집권계층에 속한 노론의 혁혁한 가계의 후예이고, 학통을 잇는 존재가 되어 조야에 큰 영향력을 미치는 학자의 지위에 올랐다.

당시의 사회는 정치적으로 산림을 중시하였는데, 그는 유수한 산림의 한 사람으로 나라 안에서 명망을 한몸에 받았다. 당시의 행세학(行勢學)은 송시열(宋時烈)을 종장(宗匠)으로 받드는 성리학이 주조를 이루고 있었으나, 그 학파 자체내에서도 ‘낙론(洛論)’과 ‘호론(湖論)’의 대립이 있었다. 그 발단은 김창협권상하(權尙夏)의 학설에서 시작된 것이다.

김창협의 이론을 이어 권상하의 제자인 이간(李柬)이재와 함께 낙론의 중심이 되고, 권상하의 이론을 이어 그의 제자 한원진(韓元震)이 호론의 중심이 되었는데, 김창협의 손자이자 이재의 문인인 김원행은 낙론을 지지하는 대표적인 학자였다. 그의 사상은 대체로 김창협의 학설을 답습하여 주리(主理)와 주기(主氣)의 절충적인 입장에 서 있었다.

학설을 종합해보면, 심(心)을 이(理)라고도 하지 않고 기(氣)라고도 하지 않으며, 이와 기의 중간에 처하여 이기(理氣)를 겸하는 의미를 지닌 것으로 여겼다. 이것은 바로 이황(李滉)의 주리설과 이이(李珥)의 주기설을 절충한 김창협 학설의 계승이었다. 나라에서 정통적 학자로 추대받아 산림의 지위에 있었던 그의 문하에서 수많은 순수 성리학자들이 배출되었고, 한편 몇 사람의 실학자도 배출되었다.

그의 학통을 이은 제자로는 박윤원(朴胤源)오윤상(吳允常)홍대용(洪大容)황윤석(黃胤錫)과 그의 아들 김이안(金履安) 등이 있다.

저서로는 『미호집』 20권 10책이 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참고문헌]

英祖實錄
梅山集(洪直弼)
續朝野輯要
國朝人物考
資料韓國儒學史草稿(李丙燾, 서울大學校文理科大學國史硏究室, 1959)
朝鮮儒學史(玄相允, 民衆書館, 1960)

[집필자]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