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간(李在簡)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774C7ACAC04B1733X0 |
자(字) | 여담(汝聃) |
생년 | 1733(영조 9) |
졸년 | 1789(정조 13) |
시대 | 조선후기 |
본관 | 용인(龍仁)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이중우(李重祐) |
조부 | 이보혁(李普赫) |
외조부 | 조적명(趙迪命) |

[관련정보]
[상세내용]
이재간(李在簡)
1733년(영조 9)∼1789년(정조 1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용인(龍仁). 자는 여담(汝聃). 공조판서 이보혁(李普赫)의 손자로, 이중우(李重祐)의 아들이며, 모친은 조적명(趙迪命)의 딸이다.
1759년(영조 35)에 통덕랑으로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곧 문한관에 임명되어 강필리(姜必履)와 함께 경연(經筵)에 참여하였다.
1763년에 암행어사가 되어 충주의 양진창(楊津倉)을 안렴하였으나, 충원현감 신확(申㬦)의 불법을 규치하지 못하여 파직되었다. 곧 수찬에 기용되어 이후 사서‧교리 등을 역임하였으나, 옥당(玉堂)관원들이 왕의 노여움을 사 모두 파면, 치죄될 때 연루되어 갑산부에 일시 유배되었다.
그뒤 교리‧헌납‧부수찬‧사간‧응교‧필선 등의 언관계통의 관리로서 활약을 하다가 1768년 승지에 발탁되어 3년 동안 계속 왕의 측근으로 있었으며, 황해감사에 임명되어 외직으로 나갔다.
2년 후 승지‧대사성‧이조참의 등을 번갈아 역임하였는데, 1776년 전주(銓注)에 공정을 기하지 못하여 홍문관의 탄핵을 받아 의금부에서 추고(推考)당하고 일시 면직되었다.
정조 즉위 후 다시 이조참의‧대사성을 거쳐, 이조참판이 되었다가 1778년(정조 2) 경상도감사로 다시 외직에 나갔다.
그뒤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한성판윤‧비변사제조‧우참찬 등을 거쳐, 이조‧형조‧예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대사헌이 되었는데, 이때 사회풍속에 대한 기강의 쇄신 및 전정(田政)의 확립을 위하여 오랫동안 중단된 양전(量田)의 실시를 주장하였다.
다시 여러 판서를 거쳐 판의금부사를 겸직하기도 하였으나, 1789년 흉언사건(兇言事件)에 연루되어 진도에 유배되었다가 곧 반역의 죄목으로 처형당하였다.
1759년(영조 35)에 통덕랑으로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곧 문한관에 임명되어 강필리(姜必履)와 함께 경연(經筵)에 참여하였다.
1763년에 암행어사가 되어 충주의 양진창(楊津倉)을 안렴하였으나, 충원현감 신확(申㬦)의 불법을 규치하지 못하여 파직되었다. 곧 수찬에 기용되어 이후 사서‧교리 등을 역임하였으나, 옥당(玉堂)관원들이 왕의 노여움을 사 모두 파면, 치죄될 때 연루되어 갑산부에 일시 유배되었다.
그뒤 교리‧헌납‧부수찬‧사간‧응교‧필선 등의 언관계통의 관리로서 활약을 하다가 1768년 승지에 발탁되어 3년 동안 계속 왕의 측근으로 있었으며, 황해감사에 임명되어 외직으로 나갔다.
2년 후 승지‧대사성‧이조참의 등을 번갈아 역임하였는데, 1776년 전주(銓注)에 공정을 기하지 못하여 홍문관의 탄핵을 받아 의금부에서 추고(推考)당하고 일시 면직되었다.
정조 즉위 후 다시 이조참의‧대사성을 거쳐, 이조참판이 되었다가 1778년(정조 2) 경상도감사로 다시 외직에 나갔다.
그뒤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한성판윤‧비변사제조‧우참찬 등을 거쳐, 이조‧형조‧예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대사헌이 되었는데, 이때 사회풍속에 대한 기강의 쇄신 및 전정(田政)의 확립을 위하여 오랫동안 중단된 양전(量田)의 실시를 주장하였다.
다시 여러 판서를 거쳐 판의금부사를 겸직하기도 하였으나, 1789년 흉언사건(兇言事件)에 연루되어 진도에 유배되었다가 곧 반역의 죄목으로 처형당하였다.
[참고문헌]
英祖實錄
正祖實錄
國朝榜目
淸選考
正祖實錄
國朝榜目
淸選考
[집필자]
장동익(張東翼)
명 : "재간(在簡)"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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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