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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돈(趙暾){2}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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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異名)숙헌(肅憲)
자(字)광서(光瑞)
호(號)죽석(竹石)
생년1716(숙종 42)
졸년1790(정조 14)
시대조선후기
본관풍양(豊壤)
활동분야문신 > 문신
조상경(趙尙絅)
외조부이정태(李廷泰)

[상세내용]

조돈(趙暾)
1716년(숙종 42)∼1790년(정조 1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광서(光瑞), 호는 죽석(竹石).

부친은 이조판서 조상경(趙尙絅)이며, 모친은 이정태(李廷泰)의 딸이다.

1740년(영조 16)에 유학으로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설서정언을 거쳐 홍문록에 오르고, 부수찬수찬교리헌납집의를 역임하였다.

1750년에 북평사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아 정배되었다가 부응교사간책례도감낭청(冊禮都監郞廳)보덕승지대사간을 거쳐, 1756년 충청도관찰사로서 도내 수령들에게 진사(賑事)가 방장(方張)하다고 부시(赴試)할 여가를 주지 않아 포상을 받기도 하였다.

참의좌윤내국부제조(內局副提調)경기도관찰사를 거쳐 예조참판 때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서 10년 만에 행하는 상참(常參)에 제신(諸臣)이 마땅히 용동(聳動)하여야 하나 이목(耳目)의 관(官)은 겨우 일원(一員)이 갖추어져 신분(臣分)이 한심하고, 응참인원(應參人員)이 서진(書進)을 하지 않으니 사체(事體)가 한심하다고 하여 파직되었다.

1761년에 순흥부사에 특보(特補)되고 개성유수를 역임하였는데, 당시 사신(史臣)이 봉공(奉公)에 확실하고 진취(進取)에 침착하여 식자(識者)들이 현명하게 여겼다고 평하였다.

한성우윤함경감사대사헌을 거쳐 1764년에 경과(慶科)의 입시망자(入試望者)로서 응하지 않아 위령(違令)하였다는 죄명으로 제학(提學) 윤급(尹汲)과 함께 호역(湖驛)에 유배되고, 그뒤 이천부사로서 폄출(貶黜)되었다.

경상감사를 거쳐 이조판서로서 걸휴(乞休)하기를 진소(陳疏)하였으나 숙명(肅命) 후에 향로(鄕路)를 찾았다는 이유로 의금부 하옥의 명을 받았다가 갑자기 제천현에 부처(付處)되었다. 판윤을 거쳐 1771년에 나이가 차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차례 걸해(乞骸)를 청하자 영조가 비로소 봉조하(奉朝賀)를 허여(許與)하고 ‘경심금수여의창연(卿心今遂予意悵然)’이라는 8자를 친제(親製)하여 하사함으로써 치사(致仕)를 허락받아 양주 천죽리(川竹里)에 퇴거하였다.

사후에 정조는 특별히 영중추(領中樞)를 증직하고 아들 중에서 관직에 있는 자는 결복(闋服)을 기다려 자세히 기록함으로써 조가기념(朝家記念)의 뜻을 보이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두 동생 조엄(趙曮)조정(趙晸)도 모두 현달(縣達)하였다.

1799년 숙헌(肅憲)으로 증시(贈諡)되었다.

[참고문헌]

英祖實錄
正祖實錄
國朝榜目
夢梧集

[집필자]

주웅영(朱雄英)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