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중대(鄭重岱)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815C911B300B1691X0 |
자(字) | 국첨(國瞻) |
호(號) | 비와(卑窩) |
생년 | 1691(숙종 17) |
졸년 | 1762(영조 38)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동래(東萊)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정순(鄭珣) |
모 | 월성이씨(月城李氏) |
외조부 | 이인건(李仁健) |
저서 | 『비와문집』 |
[상세내용]
정중대(鄭重岱)
1691년(숙종 17)∼1762년(영조 38).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국첨(國瞻), 호는 비와(卑窩).
부친은 정순(鄭珣)이며, 모친은 월성이씨(月城李氏)로 통덕랑 이인건(李仁健)의 딸이다.
1715년(숙종 41)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에 제수되었고, 1717년 봉상시주부 겸 부정자에 임명되었다. 그해 숙종에게 동서고금의 역사를 강설, 그 실력을 크게 인정받아 정자에 승진되고, 이어 박사가 되었다.
이듬해 성균관전적을 거쳐 금교도찰방(金郊道察訪)으로 나갔다.
이때 자신의 녹봉을 털어 주민들을 진휼(賑恤)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1722년(경종 2) 황해도도사가 되고, 1724년 사축서별제(司畜署別提)가 되었으며, 이듬해 교서관교리를 거쳐 무안현감으로 나갔다.
1731년(영조 7) 부사과 겸 문신선전관에 임명되고, 다음해 이조와 병조의 정랑을 거쳐 1734년 사헌부감찰에 임명되었다가 곧 사간원사간에 전임되었다.
이듬해 형조좌랑 겸 춘추관기사관이 되고, 1736년 봉상시판관이 되었다가 이듬해 양산군수로 나가 많은 치적을 쌓았다. 경학(經學)과 사학(史學)에 밝았다.
저서로는 『비와문집』 4권이 있다.
부친은 정순(鄭珣)이며, 모친은 월성이씨(月城李氏)로 통덕랑 이인건(李仁健)의 딸이다.
1715년(숙종 41)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에 제수되었고, 1717년 봉상시주부 겸 부정자에 임명되었다. 그해 숙종에게 동서고금의 역사를 강설, 그 실력을 크게 인정받아 정자에 승진되고, 이어 박사가 되었다.
이듬해 성균관전적을 거쳐 금교도찰방(金郊道察訪)으로 나갔다.
이때 자신의 녹봉을 털어 주민들을 진휼(賑恤)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1722년(경종 2) 황해도도사가 되고, 1724년 사축서별제(司畜署別提)가 되었으며, 이듬해 교서관교리를 거쳐 무안현감으로 나갔다.
1731년(영조 7) 부사과 겸 문신선전관에 임명되고, 다음해 이조와 병조의 정랑을 거쳐 1734년 사헌부감찰에 임명되었다가 곧 사간원사간에 전임되었다.
이듬해 형조좌랑 겸 춘추관기사관이 되고, 1736년 봉상시판관이 되었다가 이듬해 양산군수로 나가 많은 치적을 쌓았다. 경학(經學)과 사학(史學)에 밝았다.
저서로는 『비와문집』 4권이 있다.
[참고문헌]
國朝榜目
卑窩文集
卑窩文集
[집필자]
이동술(李東述)
대표명 | 정중대(鄭重岱) |
성명 | 정중대(鄭重岱) |
성명 : "정중대(鄭重岱)"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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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