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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계적(洪啓迪)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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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혜백(惠伯)
호(號)수허재(守虛齋)
시호(諡號)충간(忠簡)
생년1680(숙종 6)
졸년1722(경종 2)
시대조선중기
본관남양(南陽[唐])
활동분야문신 > 문신
홍우석(洪禹錫)
저서『수허재유고』

[상세내용]

홍계적(洪啓迪)
1680년(숙종 6)∼1722년(경종 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남양(南陽[唐]). 자는 혜백(惠伯), 호는 수허재(守虛齋). 이조참판 홍우석(洪禹錫)의 아들이다.

1702년(숙종 28) 진사가 되고 이듬해 성균관유생 180인과 함께 박세당(朴世堂)을 성토하는 소(疏)를 올렸다. 같은해 이경석(李景奭)의 손자인 이하성(李廈成)으로부터 소척(疏斥)을 받았고, 6월 태학생으로서 박세당『사변록(思辨錄)』이경석의 비문을 수입한 뒤 태워 없애도록 상소하여 시행시켰다.

1708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곧이어 검열이 되었다.

1712년 정언이 되고 이듬해 윤세수(尹世綏)의 소를 소척하였고, 같은해 궁중의 주악‧유희가 지나친 것에 대하여 상소하여 숙종으로부터 호피(虎皮)를 하사받기도 하였다. 이어 수찬이 된 뒤, 부교리가 되었다.

1715년 사서를 거쳐, 이어 헌납이 되었다.

이듬해 태인현감이 되고, 교리가 되어 정사처분(政事處分)의 실당(失當)에 대하여 상소하였다. 이 상소로 말미암아 유봉휘(柳鳳輝)로부터 소척을 당하고 파직당하였다. 같은해 다시 서용되어 이조좌랑이 된 뒤 윤선거(尹宣擧)의 문집에 대하여 비판하고 상소하였으며, 곧 이조정랑이 되었다.

1717년 전라좌도어사가 되어 무능한 지방관리들을 파직시키게 하였다. 같은해 응교가 되고, 세자(뒤의 경종)에게 거경진학지요(居敬進學之要)를 가르쳤고, 1718년 사간이 되었다.

이듬해 경상감사가 되었으나 전날 세수부실(稅收不實)의 문책을 받아 파직되었다가 대사성으로 복직하고, 곧 부제학이 되었다. 곧 이어 이조참의가 되고, 1720년 호조참의가 되었다가 1721년(경종 1) 대사헌이 되어 노론의 선봉으로 세제의 대리청정을 주장하여 소론과 대립하였다. 같은해 강화유수가 되고, 경종의 세제대리청정 교시를 철회하도록 하는 조신회의에 승지로 참석하였다.

같은해 부제학이 되어 이정신(李正臣)의 소를 소척하였는데, 12월에 이 소척이 불측지심(不測之心)에서 나왔다고 하여 흑산도에 안치되었고, 이듬해 노론 4대신의 당인이라는 죄목으로 서울로 압송되어 심문과 형벌을 받도록 윤성지(尹聖持)에 의하여 위협받고 갇히게 되었다.

1722년 최석항(崔錫恒)에 의하여 중형에 처하도록 주청되어 옥중에서 죽었다.

저서로는 『수허재유고』가 있다. 영조의 즉위 후 정호(鄭澔)의 주청으로 신원되고,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의간(毅簡)으로, 뒤에 충간(忠簡)으로 개시되었다.

[참고문헌]

景宗實錄
英祖實錄
國朝榜目
江漢集
藥坡漫錄

[집필자]

송준호(宋寯鎬)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