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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원명(趙遠命)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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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치경(致卿)
시호(諡號)정간(貞簡)
생년1675(숙종 1)
졸년1749(영조 25)
시대조선중기
본관풍양(豊壤)
활동분야문신 > 문신
조기수(趙祺壽)
외조부인평대군(麟坪大君)

[상세내용]

조원명(趙遠命)
1675년(숙종 1)∼1749년(영조 25).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치경(致卿).

부친은 직장 조기수(趙祺壽)이며, 모친은 종실(宗室) 인평대군(麟坪大君)의 딸이다.

1702년(숙종 28) 사마시를 거쳐 1710년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 설서용강현령(龍岡縣令)을 거쳐 정언에 올라 그해에 일어난 과옥(科獄)의 재심(再審)을 강력하게 청하다 삭탈관직되었다.

그러나 곧 간관에 복직되었으며, 이어 홍문록(弘文錄)에 선발되었으나 격식에 어긋났다 하여 삭제되었다.

1720년 경종 즉위 후 지평부수찬헌납교리사인부응교집의사간 등에 제수되었으나 거의 나아가지 않았다.

1724년 영조가 즉위한 뒤 부응교를 지내고 다음해 동부승지이조참의가 되었으나 노론의 집권으로 파직되었다.

1727년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다시 집권하자 이조참의부제학승지대사성을 역임하고, 1728년 개성유수 때 왕씨 능침(陵寢)의 수호를 명받았고, 대흥산성(大興山城)수비의 소를 올려 시행하게 하였으며, 기근이 들자 녹봉을 기민 진구(賑救)에 내놓아 송덕비(頌德碑)가 세워졌다.

이어 공조참의가 되어서는 양역법(良役法)의 개정과 균역법(均役法)의 실시에 힘썼다.

그뒤 대사헌부제학 등을 두루 지낸 뒤 1733년 함경도관찰사로 전임되자 전삼(田蔘)의 폐해를 고치는 등 선정을 베풀었고, 이어 승지이조참판예조참판을 지내고 평안도관찰사가 되어서는 이도확립(吏道確立)과 재정의 충실을 기하였으며, 함흥의 10리나 되는 만세교(萬歲橋)의 보수를 위하여 기본자산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1740년 이후 공조참판부총관동지경연사의 벼슬을 거쳐 병으로 사임하였다.

1744년 나이 70에 자헌대부에 가자되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며, 한성부판윤동지성균관사지중추부사공조판서를 역임하고, 1749년 정헌대부의정부좌참찬을 지냈다.

평생 50년을 조정에 봉직하였으나 사사로움이 없었으며, 평양감사를 지냈으면서도 돌아오는 행장은 타고 나선 말 한필뿐이었다고 한다.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참고문헌]

景宗實錄
英祖實錄
國朝榜目
耳溪集

[집필자]

오갑균(吳甲均)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