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치검색 표제어 전체
검색
김진규(金鎭圭)

[요약정보]

UCIG002+AKS-KHF_13AE40C9C4ADDCB1658X0
자(字)달보(達甫)
호(號)죽천(竹泉)
시호(諡號)문청(文淸)
생년1658(효종 9)
졸년1716(숙종 42)
시대조선중기
본관광산(光山)
활동분야문신 > 문신
김만기(金萬基)
외조부한유량(韓有良)
저서『죽천집』

[상세내용]

김진규(金鎭圭)
1658년(효종 9)∼1716년(숙종 4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달보(達甫), 호는 죽천(竹泉).

부친은 영돈녕부사 김만기(金萬基)이고, 모친은 한유량(韓有良)의 딸이며, 누이동생이 숙종비 인경왕후(仁敬王后)이다.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

1682년 진사시에 수석으로 합격하고, 1686년 정시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이조좌랑 등을 역임하던 중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하자 거제도로 유배되었다가 1694년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재집권함에 따라 지평으로 기용되었다.

노론과 소론의 대립이 깊어지자, 1695년 소론인 남구만(南九萬)에 의하여 척신(戚臣)으로 월권행위가 많다는 탄핵을 받고 삭직되었다.

1699년에는 스승을 배반하였다는 명목으로 윤증(尹拯)을 공박하였다.

1701년 대사성을 거쳐, 부제학대제학예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1713년 강화유수에 임명되었으며, 그밖에도 홍문관의 여러 관직과 사인‧빈객‧이조참판병조참판공조판서좌참찬 등의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병조참판으로 재직중일 때 소론에 의하여 유배당하였다가 2년 뒤 풀려나왔다.

문장에 뛰어나 반교문(頒敎文)‧교서‧서계(書啓)를 많이 작성하였으며, 전서‧예서 및 산수화‧인물화에 능하여 신사임당(申師任堂)의 그림이나 송시열의 글씨에 대한 해설을 남기기도 하였다.

그의 글씨로는 강화충렬사비(江華忠烈祠碑)‧대헌심의겸비(大憲沈義謙碑)‧증지평이령비(贈持平李翎碑)가 있다.

정치적으로는 대표적인 노론정객으로서, 스승인 송시열의 처지를 충실히 지켰다. 거제반곡서원(盤谷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영조가 1766년 치제(致祭)하였으며, 1773년 그 문집간행에 재물을 하사하고 서문을 친제(親製)하였다.

문집으로 『죽천집』, 편서로 『여문집성(儷文集成)』이 전한다.

[참고문헌]

肅宗實錄
英祖實錄
朝鮮金石總覽
竹泉集
儷文集成
陶谷集
疎齋集

[집필자]

손승철(孫承喆)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