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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채(金萬埰)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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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자봉(子封)
생년1644(인조 22)
졸년?(미상)
시대조선중기
본관광산(光山)
활동분야문신 > 문신
김익훈(金益勳)

[상세내용]

김만채(金萬埰)
1644년(인조 22)∼미상.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자봉(子封). 어영대장 김익훈(金益勳)의 아들이다.

1680년(숙종 6) 주부로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정언이 되어 대사헌 홍만용(洪萬容) 등과 우의정 오시수(吳始壽)의 처벌을 청하였다. 이어서 지평부수찬남한시재어사(南漢試才御史)를 지내고, 1684년 수찬이 되어 아버지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상소를 올렸다.

1689년 세자문제로 남인이 세력을 잡은 후 다시 아버지가 가혹한 고문으로 장살되자 그 억울함을 진정하다 절도로 유배되었다.

1694년 갑술옥사로 남인이 몰락하자 그의 아버지의 관작이 복관되고 그도 풀려나와 호조참의로 기용되었으며, 이어서 승지를 거쳐 1703년에는 경상도관찰사가 되고, 병조참의승지를 역임한 후 1705년 대사간이 되었다.

1708년 부사직(副司直)에 임명되었으며, 강원도관찰사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 등을 역임하고, 1712년에는 경기도관찰사가 되었다.

[참고문헌]

肅宗實錄
燃藜室記述
國朝榜目
承政院日記
備邊司謄錄
宋子大全
定齋集

[집필자]

이원근(李元根)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