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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만용(洪萬容)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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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諡號)정간(貞簡)
생년1631(인조 9)
졸년1692(숙종 18)
시대조선중기
본관풍산(豊山)
활동분야문신 > 문신
영안위(永安尉)
홍주원(洪柱元)
정명공주(貞明公主)

[상세내용]

홍만용(洪萬容)
1631년(인조 9)∼1692년(숙종 18).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풍산(豊山).

부친은 영안위(永安尉) 홍주원(洪柱元)이며, 모친은 정명공주(貞明公主)이다.

1662년(현종 3)에 통덕랑으로 정시문과에 장원급제하여 1663년 지평정언, 1664년 수찬교리이조좌랑 등을 역임하고, 1665년 판결사 김소(金素)를 청선(淸選)에 천망하지 않았다 하여 한때 파직되기도 하였으나 곧 복직되어 수찬헌납을 역임하였다.

1666년 중시문과에 다시 장원급제, 교리겸문학시강관부응교이조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1675년(숙종 1) 다시 대사간이 되고, 1676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대상(大祥)때에 크게 취한 죄로 파직되었다.

1680년 경기도관찰사를 거쳐 이듬해 대사헌이 되었다.

1689년 동지사(冬至使)청나라에 다녀왔으며, 공조예조이조 등의 판서를 역임하고 우참찬지경연사(知經筵事)에 이르렀다. 이해에 기사환국으로 사직하고 고향인 고양으로 돌아가 오직 음주로써 세월을 보내며 세상일을 말하지 않았다.

왕실의 지친이면서도 직언을 서슴지 않아 숙종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을 귀양보낼 때에는 조정에서 감히 아무도 이를 말리지 못하였으나 이들을 위하여 적극 신구(伸救)하였다.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참고문헌]

顯宗實錄
顯宗改修實錄
肅宗實錄
國朝榜目
燃藜室記述
知守齋集

[집필자]

이태진(李泰鎭)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