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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임(申銋)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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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화중(華仲)
호(號)한죽(寒竹)
시호(諡號)충경(忠景)
생년1639(인조 17)
졸년1725(영조 1)
시대조선중기
본관평산(平山)
활동분야문신 > 문신
신명규(申命圭)

[상세내용]

신임(申銋)
1639년(인조 17)∼1725년(영조 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화중(華仲), 호는 한죽(寒竹). 집의 신명규(申命圭)의 아들이며, 박세채(朴世采)의 문인이다.

1657년(효종 8) 진사시에 합격, 1680년(숙종 6) 의금부도사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가 효종릉의 사건으로 귀양간 아버지의 억울함을 격쟁(擊錚)하여 방환하게 한 뒤, 1686년 별시문과에 응시하여 병과로 급제하였다. 전적호조좌랑경기도도사정언 등을 거쳐 1696년 지평이 되었다.

이때 서문중(徐文重)이 정승이 되자,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씨(閔氏)가 복위될 때 희빈 장씨(禧嬪張氏)를 두둔하려 하였다고 탄핵하였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 경성판관으로 좌천되었다.

그뒤 곧 병조정랑 등을 거쳐 연안부사로 나갔을 때 후궁 한 사람이 그곳의 연(蓮)밭을 절수(折受) 받으려는 것을 막다가 체직되어 고향에 은거하였다. 다시 수원부사에 기용되어 황해감사대사간이조참의를 역임하고 개성유수로 임명되었으나 조정과 마찰을 빚어 파직되었다.

그뒤 육조의 여러 벼슬과 도승지대사헌 등을 역임하고, 1718년 지중추부사가 되면서 기로소에 들어갔으며, 참찬공조판서를 역임하였다. 경종이 즉위한 후 병약하자 연잉군(延礽君: 후의 영조)을 세제(世弟)로 책봉하고 대리청정하게 하려고 세자청정의 근거를 『세종실록』에서 초출하였다.

1722년(경종 2) 신임옥사가 일어나자 소론을 꾸짖고 동궁을 보호하는 상소를 올려 제주도에 위리안치되었다. 영조 즉위 후 사면되어 돌아오는 길에 해남에서 죽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경(忠景)이다.

[참고문헌]

肅宗實錄
景宗實錄
英祖實錄
國朝人物考
淸選考

[집필자]

김용곤(金鎔坤)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