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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원(金德遠)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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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자장(子長)
호(號)휴곡(休谷)
생년1634(인조 12)
졸년1704(숙종 30)
시대조선중기
본관원주(原州)
활동분야문신 > 문신
김인문(金仁文)

[상세내용]

김덕원(金德遠)
1634년(인조 12)∼1704년(숙종 30).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자장(子長), 호는 휴곡(休谷).

부친은 판관 김인문(金仁文)이다.

1662년(현종 3)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부정자로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 현종 연간에는 사헌부지평사간원정언을 역임하면서 언관(言官)으로 활약하였다.

1675년(숙종 1)에 홍문록에 오르고, 사헌부장령에 임명되었다. 경신환국(庚申換局) 전까지의 남인정권하에서는 허목(許穆)을 지지하는 청남(淸南)계열로서 당시의 권신 허적(許積)의 비리를 공격하였다.

『현종실록』 개수의 주장에 앞장섰고, 복제논쟁은 허목의 설을 따랐다. 이어 병조참판형조참판으로서의 뛰어난 재주와 원만한 성품이 숙종에게 인정되어, 서인정권이 들어서고 모든 남인이 제거될 때에도 관직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 시기에 한성판윤경기감사예조판서 등을 거쳤고, 1687년에는 사은부사(謝恩副使)연경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기사환국으로 정권이 바뀌자 곧 우의정에 임명되어 이후의 정국을 주도하였고, 실질적인 행정업무를 전담하였다.

이때 서인세력의 회유에 노력하였으나, 김수항(金壽恒) 등을 구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으면서도 살육을 방관하였다 하여 뒷날 노론세력으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인현왕후(仁顯王后)가 폐위되자 우의정을 사임하였다. 김춘택(金春澤)한중혁(韓重赫)의 역모사건이 숙종에 의해서 반전되면서 갑술환국으로 진전되자, 이를 반대하다가 제주도에 유배되었고, 4년 뒤에 해남으로 이배(移配)되었다가 풀려났다. 황해도 해주에서 죽었으며, 1711년에 신원되었다.

[참고문헌]

顯宗實錄
顯宗改修實錄
肅宗實錄
星湖文集
典故大方

[집필자]

박광용(朴光用)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