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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申晸)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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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인백(寅伯)
호(號)분애(汾厓)
시호(諡號)문숙(文肅)
생년1628(인조 6)
졸년1687(숙종 13)
시대조선중기
본관평산(平山)
활동분야문신 > 문신
신익전(申翊全)
조부신흠(申欽)
외조부조창원(趙昌遠)
저서『분애집』
저서『분애유고』
저서『임진록촬요(壬辰錄撮要)』

[상세내용]

신정(申晸)
1628년(인조 6)∼1687년(숙종 1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인백(寅伯), 호는 분애(汾厓).

조부는 영의정 신흠(申欽)이고, 부친은 참판 신익전(申翊全)이며, 모친은 조창원(趙昌遠)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였으며, 가학으로 학문을 닦았다.

1648년(인조 26) 사마시에 합격, 1664년(현종 5) 음보(蔭補)로 빙고별검(氷庫別檢)에 임명되었고, 그해에 춘당대문과(春塘臺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67년 검열설서지평정언대교 등을 역임하였다.

1669년부터 1674년까지는 문학수찬응교집의전라도관찰사대사간대사성평안도관찰사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1675년(숙종 1) 남인들이 집권하자, 서인이 추방될 때 파직당하였다가 3년 후 도승지로 다시 등용되었다.

1679년 한성부좌윤으로 있을 때 남인인 허적(許積)을 탄핵하다가 오히려 자신이 삭직당하기도 하였다.

1680년 경신대출척으로 남인이 물러나자 대사헌에 발탁되었다. 인경왕후(仁敬王后)가 죽자 빈전도감제조(殯殿都監提調)를 맡아보았고, 그뒤 우참찬예조판서공조판서좌참찬예조판서이조판서 등을 지냈다. 개성부유수에 이어 판의금부사예문관제학을 겸직한 뒤, 1685년 예조판서가 되었다. 한성판윤을 거쳐 강화부유수로 재임중 죽었다.

바른 정사로 일세의 추중(推重)을 받는 이름난 재상이었고, 시문과 글씨에 뛰어나 관각(館閣)의 전책(典冊)이나 국가의 금석문자를 찬술한 것이 많다.

특히 시에 뛰어나 격조가 청절(淸絶)하다는 평을 받았다.

저서로는 『분애집』『분애유고』『임진록촬요(壬辰錄撮要)』 등이 있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참고문헌]


[집필자]

박석무(朴錫武)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2010-10-01문과와 사마방목을 참고하여 자를 백동(伯東)에서 인백(寅伯)으로 수정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