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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원진(韓元震)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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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덕소(德昭)
호(號)남당(南塘)
시호(諡號)문순(文純)
생년1682(숙종 8)
졸년1751(영조 27)
시대조선중기
본관청주(淸州)
활동분야학자 > 유생
한유기(韓有箕)
함양박씨(咸陽朴氏)
외조부박숭부(朴崇阜)
저서『남당집』
저서『임시취고(臨時取考)』
저서『경의기문록(經義記聞錄)』
저서『퇴계집소석(退溪集疏釋)』
저서『의례경전통해보(儀禮經傳通解補)』
저서『장자변해(莊子辨解)』
저서『선학통변(禪學通辨)』
저서『왕양명집변(王陽明集辨)』
저서『거관록』
저서『심경부주차기(心經附註箚記)』
저서『춘추별전(春秋別傳)』
저서『근사록주설(近思錄註說)』
저서『이락연원록(伊洛淵源錄)』
저서『가례소의의록(家禮疏擬疑錄)』
저서『가례원류의록(家禮源流疑錄)』
저서『고사편람(古事便覽)』
저서『경의기문록』
저서『주자언론동이고』

[관련정보]

[상세내용]

한원진(韓元震)
1682년(숙종 8)∼1751년(영조 27).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덕소(德昭), 호는 남당(南塘).

세종영의정을 지낸 한상경(韓尙敬)의 후손으로, 통덕랑 한유기(韓有箕)의 아들이며, 모친은 함양박씨(咸陽朴氏)박숭부(朴崇阜)의 딸이다.

송시열(宋時烈)의 고제(高弟)인 권상하(權尙夏)의 제자들인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의 한 사람으로서 호락논쟁(湖洛論爭)에서 호론(湖論)인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을 주장한 대표적 인물이다.

8세에 공부를 시작하였는데, 처음에는 문장파악이 매우 느렸으나 수년을 지나자 한번 본 문장은 곧바로 암기할 정도로 뛰어났다.

12세에 할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성인처럼 상례를 지켰다.

1717년(숙종 43) 학행으로 천거받아 영릉참봉이 되었고, 1721년(경종 1) 부수(副率)에 임명되었으나 신임사화로 노론이 실각하자 사직하였다.

1725년(영조 1) 경연관(經筵官)으로 뽑혀 학문을 진강, 영조의 총애를 받았으나 『맹자』의 ‘신시군여구수(臣視君如仇讐)’의 구절을 인용하여 소론을 배척하다가 탕평책에 어긋난다 하여 삭직되었다.

1741년 김재로(金在魯)의 구명운동으로 복직, 그뒤 장령집의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였다. 재지(才知)가 뛰어나고 사리에 명철하였으며, 『주역』『시경』『서경』 및 사서(四書), 『태극도설』『통서(通書)』『계몽(啓蒙)』 및 여러 경세서(經世書) 등을 정독하여 성리학설에 정통하였다.

그밖에 율려(律呂)‧천문‧지리‧병가‧산수 등의 서적까지도 깊이 연구하였다. 그의 학문과 사상은 당시 성리학의 중심과제에 두루 미치고 있었으며, 17, 18세기 성리학에 대한 반성으로 등장한 실학이 남인학자층을 중심으로 활발히 전개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성리학의 연구에 몰두하여 이이(李珥)송시열권상하로 이어지는 학통을 계승하여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의 입장을 고수하였다.

심성론논쟁(心性論論爭)에서 낙론(洛論)인 이간(李柬)을 중심으로 하는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의 주장에 반대하여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이 다르다고 주장하는 인물성이론의 주장을 대표하였다.

그의 심성설의 구조는 우주만물의 생성구조에 토대를 두고 있다. 우주에는 양건(陽健)한 기(氣)로서 남성적인 것이 되며, 음순(陰順)한 기로서 여성적인 것이 되는 기화(氣化)의 단계, 음양의 기가 모여서 만물의 형체를 이루는 형화(形化)의 단계가 존재하며, 형화를 통하여 형성된 형체의 내부에도 기화가 계속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처럼 만물의 생성을 기화, 형화, 형화 속의 기화 등과 같은 삼층의 구조로서 파악하며, 이 삼층구조를 심성설에 적용하여 성(性)을 삼층구조로 파악한 것이 성삼층설(性三層說)이다.

그는 이 성삼층설에 입각하여 성을 인간과 사물이 같은 초형기(超形氣)의 성, 인간과 사물이 다른 인기질(因氣質)의 성, 인간과 인간이 서로 다른 잡기질(雜氣質)의 성 등으로 구분하여 파악하였다.

또한, 성은 이(理)가 기질 속에 내재된 뒤에 운위될 수 있는 개념이라는 이이의 생각을 계승하여, 인성과 물성은 기질을 관련시키게 되는 인기질의 차원에서 비교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와같은 사고를 근간으로 그는 인성과 물성은 다르다는 주장을 전개한 것이다. 미발심체(未發心體)의 문제에 관한 논쟁에서도 그는 미발(未發)의 심체(心體)는 본래부터 선하다고 주장하는 이간과는 달리 미발한 심체에도 선악의 가능성이 공재하는 것으로 파악하여, 미발심체유선악설(未發心體有善惡說)을 주장하였다.

그의 학문적 관심은 『주역』을 중심으로 하는 역학에도 미치고 있었으며, 그와 관련된 저술로서 『역학답문(易學答問)』『역학계몽(易學啓蒙)』『거관록(居觀錄)』『문왕역석의(文王易釋義)』 등이 있다. 이들 저술을 통하여 볼 때 역에 관하여 자연지역(自然之易)‧괘획지역(卦劃之易)‧문자지역(文字之易) 등이 있다고 하는 독특한 사고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 의미를 윤리도덕적으로 파악하는 성리학적인 역학관의 입장에 섰다.

그의 많은 저술 가운데 1741년에 저술한 『주자언론동이고(朱子言論同異攷)』송시열이 착수한 것을 그의 스승인 권상하를 거쳐 50년 만에 완성한 한국성리학사상의 거작이었다.

저서로는 『남당집』 38권이 있고, 편저로 『임시취고(臨時取考)』『경의기문록(經義記聞錄)』『퇴계집소석(退溪集疏釋)』『의례경전통해보(儀禮經傳通解補)』『장자변해(莊子辨解)』『선학통변(禪學通辨)』『왕양명집변(王陽明集辨)』『거관록』『심경부주차기(心經附註箚記)』『춘추별전(春秋別傳)』『근사록주설(近思錄註說)』『이락연원록(伊洛淵源錄)』『가례소의의록(家禮疏擬疑錄)』『가례원류의록(家禮源流疑錄)』『고사편람(古事便覽)』 등이 있다.

그러나 이들 저술 가운데에서 『경의기문록』『주자언론동이고』를 제외한 나머지 문집의 대부분은 그 판본이 김천의 직지사(直指寺)에 수장되어 있었으나, 이황(李滉)의 학설과 위배되는 설을 제기하였다는 이유에서 어사 김정희(金正喜)의 방화로 회신(灰燼)되어 희귀본이 되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참고문헌]

英祖實錄
純祖實錄
朝鮮儒學史(玄相允, 民衆書館, 1949)
資料韓國儒學史(李丙燾, 亞細亞文化社, 1989)
韓國哲學史(劉明鍾, 日新社, 1980)

[집필자]

이애희(李愛熙)

명 : "원진(元震)"에 대한 용례

전거용례
震史記略v7寵者深軫愼疾之道淸心寡慾焉上曰君臣猶父子卿旣無隱予亦何隱內間事率多虛傳然可不戒乎○別諭召經筵官韓元震元震承命造朝上値靜攝未卽見元震投疏經歸上特遣兵郞追召曰予讀史至穆生之去常慨然豈意復見於今日乎此予誠淺也元
震史記略v7上曰君臣猶父子卿旣無隱予亦何隱內間事率多虛傳然可不戒乎○別諭召經筵官韓元震元震承命造朝上値靜攝未卽見元震投疏經歸上特遣兵郞追召曰予讀史至穆生之去常慨然豈意復見於今日乎此予誠淺也元震乃承命入對辭以學淺遂告敀
震史記略v7震承命造朝上値靜攝未卽見元震投疏經歸上特遣兵郞追召曰予讀史至穆生之去常慨然豈意復見於今日乎此予誠淺也元震乃承命入對辭以學淺遂告敀疏陳正心誠意任賢安民之道上優批○命革市民玉田沙貿納之弊先是公用銀器以玉田沙磨
羹墻錄v3義補猶不若是書之切也特製下序文仍遣儒臣致祭于紫雲書院命錄文成公李珥後孫國朝寶鑑下別諭敦召經筵官韓元震元震承召上疏陳正心誠意任賢安民之道賜優批上同
小華龜鑑v19軫愼疾之道淸心寡慾焉上曰君臣猶父子卿旣無隱予亦何隱內間事率多虛傳然可不爲戒乎○丁未別諭召經筵官韓元震元震承命旣造朝上値靜攝未卽見元震投疏徑歸上特遣兵郞追召曰予讀史至穆生之去常慨然豈復見於今日乎此予誠淺也元
寒臯觀外史v56元震字德昭清州人官執義謚文純
韓史綮v2癸巳四十九年淸高宗乾隆三十八年時有經儒執義韓元震翊衛李柬者皆權尙夏之弟子也相與論人物性同異元震主同柬主異其徒傳相爭競謂之湖駱論其曰湖駱者以元震居湖西柬居漢城駱洞故
韓史綮v2執義韓元震翊衛李柬者皆權尙夏之弟子也相與論人物性同異元震主同柬主異其徒傳相爭競謂之湖駱論其曰湖駱者以元震居湖西柬居漢城駱洞故
國朝人物志v3薦之也又除刑曹參判入對于敬極堂極言治平之本又言韓元震削逸及李縡休退之事上曰元震專攻予身可也至於上及太祖是以有此擧措而今召卿而不用卿言是欲其入而閉門也韓李兩人當快用之弼
國朝人物志v3監如益孫受業于寒水齋權尙夏學問先上達故游南塘之門者雖後進小生無不融會於太極五行元震嘗語其兄啓震及弟曰人生當隨才稟而進業願兄攻科文占科第季兮明農治產業我則當志於性理之學兄後
國朝人物志v3與學者講道南塘韓元震以太極圖未發善惡人物五常說與巍巖李柬議論矛盾右柬者皆洛下諸賢而元震居湖西結城主其議者皆在湖中故謂之湖學洛學此湖洛分源之始也門人金奎五安鼎垕最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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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