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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만화(鄭萬和)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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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일운(一運)
호(號)익암(益菴)
생년1614(광해군 6)
졸년1669(현종 10)
시대조선중기
본관동래(東萊)
활동분야문신 > 문신
정광성(鄭廣成)

[상세내용]

정만화(鄭萬和)
1614년(광해군 6)∼1669년(현종 10).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일운(一運), 호는 익암(益菴).

판서 정광성(鄭廣成)의 아들이며, 영의정 정태화(鄭太和)의 아우이다.

1652년(효종 3) 생원으로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시강원설서정언수찬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경연(經筵)에서 참소를 경계할 것을 왕에게 진언하였다. 이조정랑을 거쳐 1660년 황해도관찰사가 되고, 동부승지경상도관찰사예조참의판결사(判決事)병조참의전라도관찰사대사간을 거쳐 평안도관찰사가 되어 기민(饑民)을 구호하는 한편, 타도의 유민 수천명까지 구호하는 치적을 쌓아 이원익(李元翼)과 함께 평양에 생사당(生祠堂)이 세워졌다.

그뒤 병조참판대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문장에 뛰어나 김상헌(金尙憲)이정귀(李廷龜) 등으로부터 찬탄을 받았다.

[참고문헌]

孝宗實錄
顯宗實錄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집필자]

김일기(金馹起)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