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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창(兪瑒)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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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백규(伯圭)
호(號)추담(秋潭)
호(號)운계(雲溪)
생년1614(광해군 6)
졸년1690(숙종 16)
시대조선중기
본관창원(昌原)
활동분야문신 > 문신
유여해(兪汝楷)
저서『추담집』

[상세내용]

유창(兪瑒)
1614년(광해군 6)∼1690년(숙종 16).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백규(伯圭), 호는 추담(秋潭)운계(雲溪).

서윤 유여해(兪汝楷)의 아들이다.

1635년(인조 13) 생원이 되고, 1650년(효종 1)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 1653년 세자시강원설서를 거쳐 이듬해에 지평이 되었다.

1655년 통신부사일본에 다녀오고, 동부승지충청도관찰사에 이어 1662년(현종 3) 우부승지에 임명되었다. 다음해 좌승지를 지내고 광주목사(廣州牧使)로 나갔다.

1666년 승지를 거쳐 수원부사에 재임중 진상물을 병조판서 홍중보(洪重普)에게 임의로 주었다가 발각되어 파직, 철원의 풍전역에 유배되었다.

뒤에 풀려나와 병조참판이 되고, 1674년 고부사(告訃使)청나라에 다녀왔다.

이때 서장관(書狀官)이었던 권해(權瑎)와 사감(私憾)으로 불화하였다는 탄핵을 받고 파직당하였다. 얼마 있지 않아 다시 등용되어 1679년 승지가 되었다.

한편, 예조참의로 있을 때에 허견(許堅)의 옥사가 있자, “허견의 흉모를 허적(許積)이 확실히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 세가지인데도 대간은 다만 율(律)대로 처단하기만 청하고 국문하기를 청하지는 않았으니 그 까닭을 알지 못하는 바이며, 처음부터 잡아오기를 청하지 않은 것이 벌써 옥(獄)을 다스리는 체통에 잘못된 것인데, 놓아보내라는 전교를 받고는 한마디도 역적을 다스리자는 말이 없었으니 어찌 이럴 수가 있겠는가!”라는 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1689년(숙종 15)에 개성부유수가 되었다.

저서로는 『추담집』이 있다.

[참고문헌]

孝宗實錄
顯宗實錄
肅宗實錄
燃藜室記述

[집필자]

오성(吳星)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