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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광훈(閔光勳)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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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1595(선조 28)
졸년1659(효종 10)
시대조선중기
본관여흥(驪興)
활동분야문신 > 문신
민기(閔機)
남양홍씨(南陽洪氏)

[상세내용]

민광훈(閔光勳)
1595년(선조 28)∼1659년(효종 1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여흥(驪興).

부윤 민기(閔機)의 아들이며, 모친은 남양홍씨(南陽洪氏)이다.

1616년(광해군 8) 진사에 합격하고 인조초 음보(蔭補)로 별검(別檢)이 되어 출사하였다.

1628년(인조 6) 알성문과에 장원한 뒤, 정언지평 등을 거쳐 1635년 홍문관에 등용되고, 1644년 교리, 이듬해 사간, 1649년(효종 즉위) 통정(通政)으로 승진하여 사복시정(司僕寺正)안변부사를 거쳐 사간원정언이 되었다.

1652년 승지에 오르고, 이듬해 강원도관찰사가 되었으나 재변(災變)을 보고하지 않은 죄로 삭직되었다.

1656년 다시 복직되어 병조공조참의를 지냈다. 그는 성색(聲色)을 멀리하였고 치가(治家)에는 법도가 있었으며, 관직에 나아가서는 현명한 관리라는 평을 들었다.

그가 안변부사로 있을 때, 가난한 부민을 돕기 위하여 많은 비용을 아껴서 의창(義倉)을 설치하여 부민의 생활을 도와준 사실이 있다.

병자호란 때는 청군이 몽고병과 함께 강화도에 침입하자 그는 강화도의 수비가 허술하여 승산이 없음을 깨닫고, 종묘서영(宗廟署令)으로 송국택(宋國澤)과 함께 그곳에 피신중이던 원손(元孫)을 데리고 죽음을 각오하고 바다를 건너 교동(喬桐)을 거쳐 인근 섬으로 피신하여 무사하였다.

난이 그친 뒤 원손을 호위한 공으로 통정으로 승진하여 호조참의가 되었다.

[참고문헌]

仁祖實錄
國朝人物考
國朝榜目

[집필자]

김갑주(金甲周)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