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징(金慶徵)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AE40ACBDC9D5B1589X0 |
자(字) | 선응(善應) |
생년 | 1589(선조 22) |
졸년 | 1637(인조 15)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순천(順天)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김유(金瑬) |
공신호 | 정사공신(靖社功臣) |
[관련정보]
[상세내용]
김경징(金慶徵)
1589년(선조 22)∼1637년(인조 1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선응(善應).
부친은 승평부원군(昇平府院君) 김유(金瑬)이다.
1623년 인조반정 때 세운 공으로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이 되고, 순흥군(順興君)에 봉해졌다.
같은해 개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후에 도승지를 거쳐 한성부판윤이 되었는데, 이때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강도검찰사에 임명되어 강화도 수어의 임무를 띠고 부제학 이민구(李敏求)를 부장으로 삼고, 수찬 홍명일(洪命一)을 종사관으로 삼아 함께 부임하였다.
이 섬에는 빈궁과 원손 및 봉림대군(鳳林大君)‧인평대군(麟坪大君)을 위시하여 전직‧현직 고관 등 많은 사람이 피난하였는데, 그는 혼자서 섬 안의 모든 일을 지휘, 명령하여 대군이나 대신들의 의사를 무시하였다. 그는 강화를 금성철벽(金城鐵壁)으로만 믿고 청나라 군사가 날아서 건너오지는 못할 것이라고 호언하며 아무런 대비책도 강구하지 않고 매일 술만 마시는 무사안일에 빠졌다.
한편, 김포와 통진에 있는 곡식을 피난민을 구제한다는 명목 아래 배로 실어날라 정실이 있는 사람에게만 나누어주는 처사로 민심을 크게 잃었다.
청나라 군사가 침입한다는 보고를 받고도 아무런 대비책을 세우지 않다가 적군이 눈앞에 이르러서야 서둘러 방어의 계책을 세웠으나 군사가 부족하여 해변의 방어를 포기하고 강화성 안으로 들어와 성을 지키려 하였다.
그러나 백성들이 흩어져 성을 지키기 어렵게 되자 방어책임을 맡은 그는 나룻배로 도망하여 마침내 성은 함락되었다.
대간으로부터 강화수비의 실책에 대한 탄핵을 받았는데, 인조는 원훈(元勳)의 외아들이라고 하여 특별히 용서하려 하였으나 대간의 탄핵이 완강하여 사사(賜死)하였다.
부친은 승평부원군(昇平府院君) 김유(金瑬)이다.
1623년 인조반정 때 세운 공으로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이 되고, 순흥군(順興君)에 봉해졌다.
같은해 개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후에 도승지를 거쳐 한성부판윤이 되었는데, 이때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강도검찰사에 임명되어 강화도 수어의 임무를 띠고 부제학 이민구(李敏求)를 부장으로 삼고, 수찬 홍명일(洪命一)을 종사관으로 삼아 함께 부임하였다.
이 섬에는 빈궁과 원손 및 봉림대군(鳳林大君)‧인평대군(麟坪大君)을 위시하여 전직‧현직 고관 등 많은 사람이 피난하였는데, 그는 혼자서 섬 안의 모든 일을 지휘, 명령하여 대군이나 대신들의 의사를 무시하였다. 그는 강화를 금성철벽(金城鐵壁)으로만 믿고 청나라 군사가 날아서 건너오지는 못할 것이라고 호언하며 아무런 대비책도 강구하지 않고 매일 술만 마시는 무사안일에 빠졌다.
한편, 김포와 통진에 있는 곡식을 피난민을 구제한다는 명목 아래 배로 실어날라 정실이 있는 사람에게만 나누어주는 처사로 민심을 크게 잃었다.
청나라 군사가 침입한다는 보고를 받고도 아무런 대비책을 세우지 않다가 적군이 눈앞에 이르러서야 서둘러 방어의 계책을 세웠으나 군사가 부족하여 해변의 방어를 포기하고 강화성 안으로 들어와 성을 지키려 하였다.
그러나 백성들이 흩어져 성을 지키기 어렵게 되자 방어책임을 맡은 그는 나룻배로 도망하여 마침내 성은 함락되었다.
대간으로부터 강화수비의 실책에 대한 탄핵을 받았는데, 인조는 원훈(元勳)의 외아들이라고 하여 특별히 용서하려 하였으나 대간의 탄핵이 완강하여 사사(賜死)하였다.
[참고문헌]
仁祖實錄
燃藜室記述
國朝榜目
燃藜室記述
國朝榜目
[집필자]
이장희(李章熙)
명 : "경징(慶徵)"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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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