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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로(朴𥶇)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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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노직(魯直)
호(號)대호(大瓠)
생년1584(선조 17)
졸년1643(인조 21)
시대조선중기
본관밀양(密陽)
활동분야문신 > 문신
박이서(朴彛敍)

[상세내용]

박로(朴𥶇)
1584년(선조 17)∼1643년(인조 2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노직(魯直), 호는 대호(大瓠).

이조참판 박이서(朴彛敍)의 아들이다.

1609년(광해군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보임된 뒤 홍문관수찬교리를 거쳐 사헌부지평성균관직강을 역임하였다. 그때 이조정랑에 추천되었으나 이이첨(李爾瞻)일파의 반대로 좌절되고, 1618년 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가 되었고, 이듬해 안동부사로 나갔다가 곧 사퇴하였다.

1620년 의정부검상이 되고, 청나라 병사가 요동(遼東)을 점령하여 명나라에 갔던 사신들이 돌아오지 못하자, 수리부사(修理赴使)에 임명되어 해로의 항해를 독치(督治)하게 되었다.

일행이 선천에 이르렀을 때 진위사(陳慰使)명나라에 갔던 그의 아버지 참판 박이서가 배의 전복으로 죽었다는 기별을 듣고 초혼(招魂)하여 의장(衣裝)을 거두어 돌아왔다.

1623년(인조 1) 사섬시부정(司贍寺副正)에 제수되었으나 사퇴하였다.

1624년 이괄(李适)의 난에 왕이 공주로 피난할 때 산직(散職)으로 호종하였고, 가을에 기용되어 전적(典籍)을 거쳐 장연부사(長淵府使)가 되었다. 당시 감사의 모함으로 옥에 들어갔으나 무죄임이 밝혀져 풀려났고, 1626년 무고(誣告)로 또 옥에 갇혔으나 곧 풀려났다.

1627년 정묘호란 때 왕이 강화도로 피란하자 순검사종사관(巡檢使從事官)으로 대가(大駕)를 호종하였고, 김류(金瑬)의 신임을 얻어 장악원정(掌樂院正)이 되었다. 환도(還都)후 신천군수가 되어 황해감사와 함께 구월산성(九月山城)을 수축하였고 치적이 있었다.

1630년 판결사(判決事)가 되었다가 곧 파주목사가 되었고, 얼마 뒤 장단부사가 되었다. 후금(後金)이 변방을 공략하는 등 조선을 괴롭히자, 사신으로 심양(瀋陽)에 다녀왔고, 그 공으로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가 한성우윤으로 옮겼다.

1633년 회답사(回答使)심양에 다녀와서 이조참판부총관(副摠管)사역원제조(司譯院提調)를 겸하였다.

1635년 추신사(秋信使)심양에 다녀오고, 1636년 조정의 의론이 척화(斥和)로 기울어져 청나라 사신이 성내어 돌아갔을 때 반드시 화가 일어날 것이라 하며 전비를 수습해야 된다고 역설하였다.

겨울에 청나라 병사들이 침입하자, 강화를 주선하고자 죽음을 무릅쓰고 적진에 가서 적장에게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힐책하였다.

40일 동안 잡혀 있다가 화의가 성립되자 풀려났다.

이듬해 소현세자(昭顯世子)가 볼모로 심양에 갈 때 세자빈객으로 따라갔다가 신병으로 3년 만에 귀국한 뒤, 좌승지도승지를 거쳐 1642년 병조참판을 지냈다.

[참고문헌]

仁祖實錄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집필자]

권오호(權五虎)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