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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상익(裵尙益)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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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익재(益哉)
호(號)치암(癡巖)
생년1581(선조 14)
졸년1631(인조 9)
시대조선중기
본관성주(星州)
활동분야문신 > 문신
배응경(裵應褧)
옥천전씨(沃川全氏)
외조부전해(全海)
저서『치암집』

[상세내용]

배상익(裵尙益)
1581년(선조 14)∼1631년(인조 9).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자는 익재(益哉), 호는 치암(癡巖). 본관은 성주(星州).

나주목사 배응경(裵應褧)의 아들이며, 모친은 옥천전씨(沃川全氏)통례원인의(通禮院引儀) 전해(全海)의 딸이다.

정구(鄭逑)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조수익(趙壽益)이식(李植)과 교유하였다.

1616년(광해군 8) 진사시에 합격, 성균관에 들어갔으나, 이듬해에 시작된 폐모론의 소(疏)에 가담하지 않은 이유로 유적(儒籍)을 삭탈당하였다.

그뒤 고향인 영주에 돌아가 지내다 1624년 인조반정 후 다시 문과에 급제, 1625년 성균관학유(成均館學諭)에 보임되었다.

이어 사섬시(司贍寺)내자시(內資寺) 등에 재임한 후 1627년 정묘호란 때에는 가좌사(假左史)로서 인조의 피난을 호종(扈從)하였다.

얼마 후 사간원정언 김설(金卨)의 무고(誣告)로 파직당하였으며, 그뒤 1628년 성균관전적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이듬해 형조병조원외랑(員外郞), 1630년 전라도황해도아사(亞使) 등에 여러 차례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가, 1631년 진주판관에 제수되어 부임하는 길에 여주에서 객사하였다.

천곡(泉谷)봉계서원(鳳溪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는 『치암집』이 있다.

[참고문헌]

癡巖集

[집필자]

김동현(金東鉉)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