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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로(李重老)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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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진지(鎭之)
시호(諡號)충장(忠壯)
생년1577(선조 10)
졸년1624(인조 2)
시대조선중기
본관청해(靑海)
활동분야무신 > 무신
공신호정사공신(靖社功臣)

[상세내용]

이중로(李重老)
1577년(선조 10)∼1624년(인조 2).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청해(靑海). 자는 진지(鎭之). 개국공신 이지란(李之蘭)의 후손이다.

16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훈련도감낭청을 지내고, 1621년(광해군 13)에 이천부사(伊川府使)가 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 때 훈련대장 이흥립(李興立), 장단부사 이서(李曙) 등과 함께 장졸을 모아 참여하였으므로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에 녹훈(錄勳)되었고 청흥군(淸興君)에 봉하여졌다. 광해군강화도로 쫓겨나자 강화부윤에 임명되어 보살피었다. 그뒤 오위도총부부총관훈련도정을 겸임하고, 포도대장을 지냈다.

1624년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키자 부도체찰사 이시발(李時發)과 함께 경기.강원 양도 좌방어사가 되어(주1)
방어사경력
『계곡집(谿谷集)』 26권 "청흥군 이중로의 죽음을 슬퍼함[哭靑興君李重老]" 참고.
반란군을 저지하는 책임을 맡았다. 예성강 상류인 마탄(馬灘)에서 여울물을 지켜 적을 막으려는 싸움준비를 하던 중, 적의 급습으로 관군이 패할 때 우방어사 이성부(李聖符) 등과 함께 전사하였다. 왕은 그가 늙은 아버지가 있음에도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하여 매우 슬퍼하였다 한다. 다행히 그의 시신은 유효걸(柳孝傑)이 전복(戰服)으로 싸서 묻고 표를 해놓았기 때문에 찾았다.

이괄의 난은 이수백(李守白) 등이 이괄의 목을 베어와서 항복함으로써 끝을 맺었으나, 이중로의 아들 이문웅(李文雄)이수백이 아비를 죽인 이괄의 무리라 하여 대낮에 목베어 복수하였다. 후에 병조판서에 추증되었고, 금천민충사(愍忠祠)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참고문헌]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大東野乘
燃藜室記述
西征錄
續雜錄
靖社錄
江華誌

[집필자]

차용걸(車勇杰)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