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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령(金坽)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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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자준(子峻)
호(號)계암(溪巖)
시호(諡號)문정(文貞)
생년1577(선조 10)
졸년1641(인조 19)
시대조선중기
본관광산(光山)
활동분야문신 > 문신
김부륜(金富倫)
외조부신수민(申壽民)
출신지예안

[상세내용]

김령(金坽)
1577년(선조 10)∼1641년(인조 1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자준(子峻), 호는 계암(溪巖). 예안 출신.

부친은 현감 김부륜(金富倫)이며, 모친은 평산신씨부호군(副護軍) 신수민(申壽民)의 딸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의 나이 17세에 유성룡(柳成龍)의 막하로 자진 종군하여 당시 명나라총병사 오유충(吳維忠)유격장 노득공(盧得功) 두 사람으로부터 후한 대접을 받았을 정도로 학식이 숙성하였다.

그뒤 1612년(광해군 4)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등용된 뒤 여러 벼슬을 거쳐 주서에 이르렀으나, 광해군의 어지러운 정치를 비관하여 관직을 사직하고 낙향하였다.

1618년 인목대비가 폐위되자 두문불출하고 독서로 소일하였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위험을 무릅쓰고 한양으로 인조를 찾아나섰으나 난이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아들 김요형(金耀亨)을 시켜 소를 올리게 하고서 돌아왔다. 뒤에 신하로서 아들을 시켜 상소하는 것이 도리에 어긋났다는 격렬한 상소가 있었으나 인조가 이를 모두 무마시켰다.

그뒤로도 학덕을 잊지 못한 인조장령보덕헌납사간 등으로 여러 차례 불렀으나 번번이 나가지 않았다.

그러나 병자호란이 일어나 청나라 병사가 남한산성을 포위하자 가산을 모두 털어 의병들의 군량미로 충당하였으며, 끝내 남한산성이 함락되자 비분강개한 시 수 편을 남겼다.

벼슬에서 물러나 죽을 때까지 처음에는 제자들과 경승지(景勝地)를 찾아 마음을 달래었으나, 마지막 20여년간은 문밖 출입을 삼가하며 오가는 사람도 방에 앉아 영접하고 보내, 세상에서 영남 제1인이라고 불렀다.

1689년(숙종 15)에 도승지에 추증되었고, 영조 때는 원액(院額)이 하사되었다.

저서로는 『계암집(溪巖集)』 6권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참고문헌]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肅宗實錄
英祖實錄
國朝人物考
國朝榜目

[집필자]

서신석(徐信錫)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