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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성(李民宬)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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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관보(寬甫)
호(號)경정(敬亭)
생년1570(선조 3)
졸년1629(인조 7)
시대조선중기
본관영천(永川)
활동분야문신 > 문신
이광준(李光俊)
평산신씨(平山申氏)
외조부신권(申權)
출생지경상북도 의성
저서『경정집』
저서『조천록(朝天錄)』

[상세내용]

이민성(李民宬)
1570년(선조 3)∼1629년(인조 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관보(寬甫), 호는 경정(敬亭). 경상북도 의성 출생.

부친은 관찰사 이광준(李光俊)이며, 모친은 평산신씨(平山申氏)인의(引儀) 신권(申權)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 경사(經史)와 제자백가서를 두루 통달하였으며, 효성과 우애가 있어 재덕을 겸비한 인물이었다.

1597년(선조 30) 정시문과에 갑과로 급제, 승문원정자에 뽑혔으며, 1601년 승정원주서를 거쳐 그 이듬해 시강원설서에 제수되고 사서로 승진, 서장관(書狀官)으로 차출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603년 예조좌랑을 거쳐 병조좌랑에 전임되고, 곧 정랑으로 승진되었다.

1605년 이조정랑에 천거되었으나 정인홍(鄭仁弘)일당의 반대로 제주점마어사(濟州點馬御史)가 되었다.

그뒤 얼마간 일을 보다가 시사(時事)의 동향이 심상하지 않아 벼슬을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갔다.

1608년 사헌부지평에 제수되었으며, 문학(文學)으로 옮겨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그 이듬해 옥당(玉堂)에 선입(選入)되었으나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귀향, 여묘(廬墓) 3년을 마치고 홍문관수찬에 다시 임명되었으며, 그뒤 교리세자시강원겸문학 등을 역임하였다.

1617년(광해군 9) 정조(鄭造)윤인(尹訒) 등이 폐모론을 발의하자 윤기(倫紀)에 득죄(得罪)함이 심하다는 내용의 차자(箚子)를 올렸다가 이이첨(李爾瞻) 등의 모함을 받아 삭직되어 그뒤 고향에 내려가서 거의 10년 동안 글씨와 그림으로 소일하다가 1623년 인조반정 때 사헌부장령에 복직하였다.

주청사(奏請使)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와 그 공로로 성균관사성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의 가자(加資)를 받고, 아울러 전답과 노비를 하사받았다.

그뒤 동부승지를 거쳐 좌승지에 승진되었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영남호소사(嶺南號召使) 장현광(張顯光)의 추천으로 경상좌도의병대장이 되어 전주에까지 진출, 왕세자를 보호하였다.

1629년 형조참의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사직, 그해에 죽었다. 직언을 잘하기로 이름 높았으며, 의리에 강하여 광해군의 난정 때 간당(奸黨)들에게 모함을 받은 이덕형(李德馨)이원익(李元翼)영창대군(永昌大君)을 구출하려고 힘썼다.

시문과 글씨에 뛰어났으며, 명나라에 갔을 때 그곳의 학사‧대부들과 수창(酬唱)한 시는 사람들에게 애송되어 중국사람들이 그를 이적선(李謫仙: 이태백을 이름.)이라 불렀다고 한다. 지금까지 전하는 시는 1천여수에 이른다. 경상북도 의성장대서원(藏待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경정집』 13권, 보유(補遺)합 4책과 『조천록(朝天錄)』 등이 전한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樊巖集(蔡濟恭)
嶺南人物考

[집필자]

이민식(李民植)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