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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빈(李箕賓)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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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응설(應說)
생년1563(명종 18)
졸년1625(인조 3)
시대조선중기
본관전주(全州)
활동분야무신 > 무신
이노(李櫓)

[상세내용]

이기빈(李箕賓)
1563년(명종 18)∼1625년(인조 3).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응설(應說).

통훈대부 행수안군수(通訓大夫行遂安郡守) 이노(李櫓)의 아들이다.1583년(선조 16) 계미(癸未) 별시(別試) 병과(丙科) 55위로 무과에 급제하여, 1592년(선조 25) 이천부사(利川府使), 1593년(선조 26) 진주목사(晉州牧使), 1599년(선조 32) 강계부사(江界府使), 1600년(선조 33) 평안도병사(平安道兵使), 1603년(선조 36)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1604년(선조 37) 공조참판(工曹參判), 1607년(선조 40) 삼도수군통제사겸경상도수군절도사(三道水軍統制使兼慶尙道水軍節度使), 1609년(광해 1) 제주목사(濟州牧使), 1619년(광해 11) 평안순변사(平安巡邊使), 1625년(인조 3) 함경북도절도사(咸鏡北道節度使) 등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1625년(인조 3)에 사망하였는데,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따르면 “함경북도절도사 이기빈(李箕賓)이 죽었다. 이기빈은 탐학(貪虐)을 자행한 무부(武夫)였다. 지난 광해 조 때, 뇌물을 궁액(宮掖)에 바치고 제주목사(濟州牧使)에 제수받았으나, 부임한 뒤에는 오로지 자기 한 몸 살찌우기만을 힘썼다. 하루는 유구국(琉球國)의 왕자(王子)가 보물을 가득 싣고 제주 경내에 정박했는데, 이는 대개 바람 때문에 표류하여 오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이기빈판관 문희현(文希賢)과 포위하고 모조리 죽인 뒤 그 재화(財貨)를 몰수해 들였는데, 왕자가 정절(旌節)을 벌여놓고는 안색을 변하지 않고 조용히 해를 당했으므로 이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애처롭게 여겼다. 사실이 발각되어 이기빈이 옥에 갇혔는데 광해에게 보물을 많이 바쳤기 때문에 형장(刑章)을 면할 수 있었다. 그런데 반정(反正)한 뒤에 와서도 여전히 북관(北關)의 중임을 맡겼으니, 오늘날 사람을 쓰는 것이 구차하다 하겠다.”고 기록하고 있다.

[참고문헌]

朝鮮王朝實錄 宣祖實錄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http://people.aks.ac.kr)

[집필자]

이세호
수정일수정내역
2008-12-312008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