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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선(朴東善)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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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자수(子粹)
호(號)서포(西浦)
시호(諡號)정헌(貞憲)
생년1562(명종 17)
졸년1640(인조 18)
시대조선중기
본관반남(潘南)
활동분야문신 > 문신
박응천(朴應川)
조부박소(朴紹)
저서『서포기문(西浦記聞)』

[상세내용]

박동선(朴東善)
1562년(명종 17)∼1640년(인조 18).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자수(子粹), 호는 서포(西浦). 사간 박소(朴紹)의 손자로, 사재감정(司宰監正) 박응천(朴應川)의 아들이며, 금주군(錦州君) 박정(朴炡)의 아버지이다.

1589년(선조 22) 28세에 진사가 되었고, 이듬해 증광별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들어갔으며, 여러 벼슬을 거쳐 병조좌랑이 되었다.

그뒤 남포현감으로 이몽학(李夢鶴)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는데, 논공행상에 그를 시기하는 사람이 있어 제외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났을 때 현민들을 안전한 곳으로 피난시켰다.

그뒤 성균관전적직강예조좌랑병조좌랑사복시정 등을 차례로 지내고, 경기도사수안군수에 이어 인천부평남양 등의 부사를 지냈는데 가는 곳마다 치적이 있었다.

광해군이 즉위하여 그를 대사간에 임명하자 그의 패륜행위를 못마땅히 생각하여 사양하였으나 참의로 임명되었다. 이어 대사간에 임명되었으나 사직하였다.

1613년(광해군 5) 폐모론이 일어나자 이를 적극 반대하고 시골로 내려가 은거하였다. 인조반정으로 대사간이 되었으며 이듬해인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 병조참의로서 인조를 모시고 공주로 피난갔다가 난이 평정된 뒤 돌아와 가선대부대사헌이 되었고, 이조참판을 거쳐 다시 대사헌이 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를 모시고 강화로 갔으며, 형조판서좌참찬우참찬지돈녕부사지중추부사 겸 지경연사지의금부사춘추관사 등을 역임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 때는 늙고 병든 몸으로 왕손을 호종하고 강화교동호서 등지로 피난하였다가 난이 끝난 뒤 한성에 돌아와 좌참찬이 되었다.

저서에 『서포기문(西浦記聞)』이 있다. 시호는 정헌(貞憲)이다.

[참고문헌]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大東野乘

[집필자]

홍종필(洪鍾佖)

명 : "동선(東善)"에 대한 용례

전거용례
國朝編年v15兵且召州居武將林得義朴名賢前兵使辛景恒等爲守城計藍浦縣監朴東善聞變急報于水使崔湖發兵欲進救洪州水使令東善馳來相議東善因聚兵馳進欲直往洪州崔湖以水軍非陸戰之卒有持難之色東善大言曰此誠何時而較水陸之異耶遂盡發
宣廟中興誌v5乘勝攻洪州牧使洪可臣收兵固守賊攻之數日不能克藍浦縣監朴東善急見水使崔湖欲發水營兵救之湖以水陸異責難之東善大言曰此誠何時而較水陸之異耶遂盡發水營兵具令保寧縣監黃應聖聚集本縣兵同入洪州城二中大喜夜列炬雉堞照耀
小華龜鑑v13字季肯號西溪西浦東善孫霞石炡子逸判中樞耆社諡文簡公著思辨錄子泰輔
壬辰錄v5州牧使洪可臣 收兵固守賊攻之數日不能克藍浦縣監朴東善 急見水使崔湖 欲發水營兵救之湖以水陸之異責難之東善 大言曰此誠何時而較水陸之異耶遂盡發水營兵且令保寧縣監黃應聖 聚集本縣兵同入洪州城城中大喜夜列炬照耀
國朝捷錄v01西溪判書泰輔父父參判炡祖判書東善曾祖應川
郯述v02己未東善子癸亥拜吏參
郯述v03東善孫七十五
國朝人物志v2者皆心悅而敬之以爲厚德長者爲藍浦縣監時鴻山賊李夢鶴劫數縣縛其守宰轉逼洪州東善邀水使崔湖同討湖初不肯東善責以義乃從遂發傍縣兵同赴洪州與牧使洪可臣合兵
國朝人物志v3字大觀號霞石羅州人東善子乙卯進士己未文科丙寅重試錄靖社勳封錦洲君壬戌冬有告撥亂之擧炡乃見金瑬曰國之社稷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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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