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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金涌)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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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도원(道源)
호(號)운천(雲川)
생년1557(명종 12)
졸년1620(광해군 12)
시대조선중기
본관의성(義城)
활동분야문신 > 문신
김수일(金守一)
저서『운천집(雲川集)』
저서『운천호종일기(雲川扈從日記)』

[상세내용]

김용(金涌)
1557년(명종 12)∼1620년(광해군 12). 조선 선조광해군 때의 문신.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도원(道源), 호는 운천(雲川). 찰방 김수일(金守一)의 아들이며, 김성일(金誠一)의 조카이다.

1590년(선조 23)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권지정자(承文院權知正字)를 거쳐 예문관검열로 옮겼다가 천연두가 발병하여 사직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향리인 안동에서 의병을 일으켜 안동수성장(安東守城將)에 추대되었고, 이듬해 예문관검열봉교, 성균관전적 등을 지냈다. 이어 정언헌납부수찬지평을 거쳐 이조정랑에 올랐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제도도체찰사(諸道都體察使) 이원익(李元翼)종사관으로 수행하여 많은 활약을 하였으며, 교리에 재임중 독운어사(督運御史)로 나가 군량미 조달에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조정에서 동서분당(東西分黨)이 이루어져 후원하던 영의정 유성룡(柳成龍)이 서인에 의하여 축출되자, 탄핵을 받아 선산부사로 체직되었다.

이때 금오서원(金烏書院)을 이건하고 향교를 중수하는 등 문교에 힘썼다. 이후 계속되는 대간의 탄핵을 받으며 경직과 외직을 전전하였는데, 일시 제용감정필선(弼善)집의 등 경직에 머물다가 예천군수상주목사홍주목사 등의 외직을 지내면서 오직 보민(保民)과 흥학(興學)에 힘썼다.

1609년 봉상시정으로 춘추관편수관을 겸하여 『선조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그 공으로 통정대부에 올라 병조참의를 지내고, 1616년에 여주목사로 나갔는데, 이때 나이 이미 60세였다.

조정의 당쟁이 날로 심해지므로 맏아들의 죽음을 구실로 향리로 돌아왔다가 4년 뒤에 죽었다. 안동 덕봉서원(德峰書院)묵계서원(黙溪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운천집(雲川集)』『운천호종일기(雲川扈從日記)』(보물 제484호) 등이 있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光海君日記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國朝榜目

[집필자]

장동익(張東翼)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