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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현광(張顯光)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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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덕회(德晦)
호(號)여헌(旅軒)
시호(諡號)문강(文康)
생년1554(명종 9)
졸년1637(인조 15)
시대조선중기
본관인동(仁同)
활동분야학자 > 유생
장열(張烈)
경산이씨(京山李氏)
외조부이팽석(李彭錫)
저서『여헌집』
저서『속집』
저서『성리설(性理說)』
저서『역학도설(易學圖說)』
저서『용사일기(龍蛇日記)』

[관련정보]

[상세내용]

장현광(張顯光)
1554년(명종 9)∼1637년(인조 15).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덕회(德晦), 호는 여헌(旅軒).

부친은 증이조판서 장열(張烈)이며, 모친은 경산이씨(京山李氏)제릉참봉(齊陵參奉) 이팽석(李彭錫)의 딸이다. 경상북도 인동에서 성장하였다.
1. 가계
14세 때인 1567년(명종 22)부터 진사 장순(張峋)에게 배웠고 18세 때 「우주요괄첩(宇宙要括帖)」을 지어 유학자의 면모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2. 행적
침식을 잊으며 학문에 정진하여 23세 때인 1576년(선조 9)에 재능과 행실이 드러나 조정에 천거되었다.

1591년 겨울 모부인의 상중에 전옥서참봉(典獄署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다음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금오산(金烏山)으로 피란하였다.

1594년 예빈시참봉제릉참봉 등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해에 유명한 「평설(平說)」을 지었다.

다음해 가을 보은현감에 임명되어 부임하였으나 12월 관찰사에게 세번씩 사직을 청하였고 이듬해 2월 또 세번 사직을 청한 뒤 허가를 기다리지 않고 향리에 돌아갔다가 직무유기 혐의로 의금부에 잡혀갔다.

1597년 여러 차례 그를 조정에 추천하였던 유성룡(柳成龍)을 만났는데, 그의 학식에 감복한 유성룡은 아들을 그 문하에 보내어 배우게 하였다.

1601년 경서교정청낭청(經書校正廳郞廳)에 임명되었고 여러 번 부름을 받았으나 나가지 않았다.

1602년 거창현감경서언해교정낭청(經書諺解校正郞廳)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다가 그해 11월 공조좌랑으로 부임하여 『주역』 교정에 참가하였고 형조좌랑에 옮겨졌으나 이듬해 2월 돌아왔다.

1603년 용담현령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곧 의성현령에 임명되어 부임하였으나 몇 달 만에 돌아갔다.

1604년 순천군수, 1605년 합천군수, 1607년 사헌부지평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55세 때 「주역도설(周易圖說)」을 지었고, 68세 때 「경위설(經緯說)」을 지어 ‘이체기용(理體氣用)’, 즉 ‘이경기위설(理經氣緯說)’을 제창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후 김장생(金長生)박지계(朴知戒)와 함께 여러 번 왕의 극진한 부름을 받았고, 사헌부지평성균관사업 등에 여러 번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나가지 않다가 다음해 사헌부장령으로 부임하여 왕을 알현하였고, 곧 사헌부집의공조참의로 승진되어 경연(經筵)과 서연(書筵)에 참석하도록 부탁받았으나 사양하고 돌아갔다.

이어 이조참의승정원동부승지용양위부호군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다.

1626년(인조 4) 형조참판에 특제되어 마지못하여 사은하였고 계속하여 사헌부대사헌부호군에, 1628년 이조참판, 1630년 다시 대사헌 등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그뒤에도 여러 차례 지중추부사의정부우참찬 등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3. 병자호란 지원
1636년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여러 군현에 통문을 보내어 의병을 일으키게 하고 군량미를 모아 보냈다.

그러나 다음해 2월 삼전도(三田渡)에서의 항복소식을 듣고 세상을 버릴 생각으로 동해가의 입암산(立嵒山)에 들어간 지 반년 후에 죽었다.

1655년(효종 6) 의정부좌찬성, 1657년 영의정이 추증되었다.

그는 일생을 학문과 교육에 종사하였고 정치에 뜻을 두지 않았으나 당대 산림의 한 사람으로 왕과 대신들에게 도덕정치의 구현을 강조하였고, 인조반정 직후에는 공신들의 횡포를 비판하고 함정수사를 시정하게 하는 등의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하였다.
4. 학문업적
그는 정구(鄭逑)에게 수학한 적이 있어 퇴계학파로 분류되고 있으나 이기론‧심성론 등에 있어서는 이황(李滉)의 학설과 상이한 점이 많았다.

그는 이(理)와 기(氣)를 이원적으로 보지 않고 합일적 혹은 한 물건의 양면적인 현상으로 파악하였는데, 그의 「경위설」에서는 이를 경(經)으로, 기를 위(緯)로 비유하여 이‧기가 둘이 아니고 체(體)와 용(用)의 관계에 있음을 주장하였다.

심성론에 있어서는 도심(道心)을 ‘미발지성(未發之性)’으로, 인심을 ‘이발지정(已發之情)’으로 파악하였으나 이미 발한 뒤에도 역시 도심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하였다.

즉, 도심이 인심 가운데 있고 인심이 도심 가운데 있어 별개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고 본 것이다.

그는 또 사단(四端)이 칠정(七情)밖에 있는 것이 아니고 칠정 가운데에서 본성을 따라 발현하여 거짓되지 않은 것이 사단일 뿐이라 하여 사단의 순수고유한 발현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러한 그의 철학은 명나라나흠순(羅欽順)이이(李珥)의 이기심성론에 크게 영향을 받은 것으로 남인계열의 학자들 중에서는 매우 이색적이고 독창적인 학설이다.

저서로는 『여헌집』 11권, 『속집』 5권, 『성리설(性理說)』 6권, 『역학도설(易學圖說)』 9권, 『용사일기(龍蛇日記)』 2권 등이 있다.

성주천곡서원(川谷書院), 서산여헌영당(旅軒影堂), 인동동락서원(同洛書院), 청송송학서원(松鶴書院), 영천임고서원(臨皐書院), 의성빙계서원(氷溪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仁祖實錄
旅軒集
眉叟記言
韓國儒學史略(李丙燾, 亞細亞文化社, 1986)
張旅軒思想의 硏究―性理說을 中心으로―(劉明鍾, 慶北大論文集 5, 1962)

[집필자]

송찬식(宋贊植)

호 : "여헌(旅軒)"에 대한 용례

전거용례
寒岡先生言行錄謬條辨破錄齊誼分 雖重而實無執經受業之事故寒岡未 嘗以門人待旅軒旅軒亦不以門人自 處今考之兩先生文集中輓誄行狀及
寒岡先生言行錄謬條辨破錄箚記諸子目錄以旅軒先生爲首題一箚記諸子目錄以旅軒先生爲首題謹按目錄中諸子皆是寒岡門下而以 旅軒姓諱
寒岡先生言行錄謬條辨破錄抄節旅軒先生所製寒岡先生行狀變爲箚錄九條一抄節旅軒先生所製寒岡先生行狀變爲箚 錄九條謹按先賢文字雖閑
國朝人物志v2月終尋夏雲天幸欲酬恩愛安能繼父賢人物考謪謫驪州時住戶長家織席爲業戶長妻死公指揮治喪旅軒張顯光笑曰領議政治戶長妻喪戶長侈矣旅軒續集
國朝人物志v2字子固號陋菴靑松人旣冠受學于寒岡鄭逑又從旅軒張顯光游婦家稍饒富婚時服食之澤皆屛斥俾不以近身仍着菲衣曰號我百結居士足矣當光海時年雖甚少
國朝人物志v3字孝翼號雙峯老人延日人高麗直臣襲明之後嘗從旅軒張顯光學顯光一見異之待以朋友又摳衣於寒岡鄭逑逑常目送曰月城復有人官至王子師傅人
國朝人物志v3字明之號竹磵信川人與旅軒張顯光膺六條薦擢拜長水縣監爲星州牧時聞李适叛調兵食馳赴扞衛爲一道先仁祖大嘉之
國朝人物志v3字德晦號旅軒仁同人生時家有紫氣七歲始學八歲而孤十一歲氣象宏偉鄭愨□堂鵬子見而奇之曰兒必爲間世人物贈
國朝人物志v3字德勇號澗松咸安人幼瑩秀不凡從旅軒張顯光學四十年潛心洛建之業自治甚嚴所居有江湖樓臺之勝有時從扁舟泝洄吟弄光海時鄭仁弘
國朝人物志v3字晉甫號懶齋鵝州人校理達道弟貌如玉沈重異凡兒旅軒張顯光敎之聰明日進十餘歲通經史百家丙午進士甲子文科丁卯扈駕江都戊辰以書狀官航海赴
國朝人物志v3釣耕堂牙山人府使孝範曾孫幼受業于承旨睦長欽兄弟卜居昌原洛濱從游寒岡旅軒之門丁卯丙子之胡亂推公爲十二邑義兵將其見重于士類如此上同
睡翁先生日記n1-2책旅軒名顯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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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