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임(李仁任)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774C778C784D1388X0 |
생년 | ?(미상) |
졸년 | 1388(우왕 14) |
시대 | 고려후기 |
본관 | 성주(星州) |
활동분야 | 관료 > 권신 |
조부 | 이조년(李兆年) |
공신호 | 순성동덕보리공신(純誠同德輔理功臣) |
[상세내용]
이인임(李仁任)
미상∼1388년(우왕 14). 고려의 권신(權臣). 본관은 성주(星州).
이조년(李兆年)의 손자로서, 처음 문음(門蔭)으로 전객시승(典客寺丞)이 된 후 전법총랑(典法摠郞)을 거쳐 1358년(공민왕 7)에는 좌부승선(左副承宣)이 되었다.
이듬해 홍건적이 침입하여 의주를 함락시키자 서경존무사(西京存撫使)에 임명되어 홍건적에 대비하였고, 1361년의 재침 때에도 크게 활약하였으며, 1363년 원나라가 덕흥군(德興君: 충선왕의 셋째아들)을 왕으로 삼아 고려에 들이려 하였을 때 서북면도순문사 겸 평양윤이 되어 덕흥군 일파의 침략을 물리치는 출정군의 식량조달을 담당하였다.
이어 삼사우사(三司右使)‧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좌시중(左侍中)을 지내고, 순성동덕보리공신(純誠同德輔理功臣)의 칭호를 받았으며, 1374년(공민왕 23) 잠시 면직되었다가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에 임명되고 광평부원군(廣平府院君)에 책봉되었다.
공민왕이 피살되자 명덕태후(明德太后)와 시중 경복흥(慶復興)은 종친을 새로운 왕으로 세우려고 하였으나 그는 자신의 일파와 모의하여 나이 10세의 어린 우왕을 즉위시켰으며, 한편으로는 당시 고려에 와 있던 명나라 사신 채빈(蔡斌)이 공민왕 피살사건을 본국에 보고하여 그 책임이 재상인 자신에게 돌아올 것을 염려한 나머지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채빈을 호송관 김의(金義)로 하여금 중간에서 살해하게 하고, 그동안 배척되었던 원나라와 가깝게 지내려고 하였다.
이에 삼사좌윤(三司左尹) 김구용(金九容), 전리총랑(典理摠郞) 이숭인(李崇仁), 전의부령(典儀副令) 정도전(鄭道傳), 삼사판관(三司判官) 권근(權近)이 정부의 친원외교정책을 비판하고, 우헌납 이첨(李詹)이 자신과 찬성사 지윤(池奫)의 죄목을 열거하여 목벨 것을 상소하자, 최영(崔瑩)‧지윤 등과 합심하여 이첨‧전백영을 사기죄로 몰아 유배시키고 김구용‧이숭인‧정몽주(鄭夢周)‧임효선(林孝先)‧정사도(鄭思道)‧박형(朴形)‧이성림(李成林) 등은 자신을 해치려 한다고 꾸며 모두 유배시켰다.
반대세력을 제거한 후, 지윤‧임견미(林堅味)‧염흥방(廉興邦)과 함께 권력을 휘두르면서 관직과 옥(獄)을 팔고 전국에 걸쳐 토지와 노비를 축적하는 등 탐학을 일삼았으며, 이어 영문하부사(領門下府事)‧영삼사사(領三司事)를 거쳐 영중방 사헌 개성부사(領重房司憲開城府事)에 임명되고, 1386년(우왕 12)에는 다시 좌시중이 되었다가 이듬해 노병으로 사직하였다.
그런데 1388년 염흥방의 가노(家奴) 이광(李光)이 주인의 권세를 배경으로 전직 밀직부사 조반(趙胖)의 토지를 빼앗자 이에 격분한 조반이 이광을 죽이니 염흥방이 조반을 국가모반죄로 몰아 순군(巡軍)에 가두고 심하게 고문시킨 사건을 계기로, 그동안 기회를 엿보던 우왕‧최영‧이성계 등이 오히려 염흥방‧임견미‧왕복해(王福海) 등을 처단하고 그 일파를 유배시켰는데, 이때 이인임도 경산부로 옮겨졌다가 곧 죽었다.
이조년(李兆年)의 손자로서, 처음 문음(門蔭)으로 전객시승(典客寺丞)이 된 후 전법총랑(典法摠郞)을 거쳐 1358년(공민왕 7)에는 좌부승선(左副承宣)이 되었다.
이듬해 홍건적이 침입하여 의주를 함락시키자 서경존무사(西京存撫使)에 임명되어 홍건적에 대비하였고, 1361년의 재침 때에도 크게 활약하였으며, 1363년 원나라가 덕흥군(德興君: 충선왕의 셋째아들)을 왕으로 삼아 고려에 들이려 하였을 때 서북면도순문사 겸 평양윤이 되어 덕흥군 일파의 침략을 물리치는 출정군의 식량조달을 담당하였다.
이어 삼사우사(三司右使)‧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좌시중(左侍中)을 지내고, 순성동덕보리공신(純誠同德輔理功臣)의 칭호를 받았으며, 1374년(공민왕 23) 잠시 면직되었다가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에 임명되고 광평부원군(廣平府院君)에 책봉되었다.
공민왕이 피살되자 명덕태후(明德太后)와 시중 경복흥(慶復興)은 종친을 새로운 왕으로 세우려고 하였으나 그는 자신의 일파와 모의하여 나이 10세의 어린 우왕을 즉위시켰으며, 한편으로는 당시 고려에 와 있던 명나라 사신 채빈(蔡斌)이 공민왕 피살사건을 본국에 보고하여 그 책임이 재상인 자신에게 돌아올 것을 염려한 나머지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채빈을 호송관 김의(金義)로 하여금 중간에서 살해하게 하고, 그동안 배척되었던 원나라와 가깝게 지내려고 하였다.
이에 삼사좌윤(三司左尹) 김구용(金九容), 전리총랑(典理摠郞) 이숭인(李崇仁), 전의부령(典儀副令) 정도전(鄭道傳), 삼사판관(三司判官) 권근(權近)이 정부의 친원외교정책을 비판하고, 우헌납 이첨(李詹)이 자신과 찬성사 지윤(池奫)의 죄목을 열거하여 목벨 것을 상소하자, 최영(崔瑩)‧지윤 등과 합심하여 이첨‧전백영을 사기죄로 몰아 유배시키고 김구용‧이숭인‧정몽주(鄭夢周)‧임효선(林孝先)‧정사도(鄭思道)‧박형(朴形)‧이성림(李成林) 등은 자신을 해치려 한다고 꾸며 모두 유배시켰다.
반대세력을 제거한 후, 지윤‧임견미(林堅味)‧염흥방(廉興邦)과 함께 권력을 휘두르면서 관직과 옥(獄)을 팔고 전국에 걸쳐 토지와 노비를 축적하는 등 탐학을 일삼았으며, 이어 영문하부사(領門下府事)‧영삼사사(領三司事)를 거쳐 영중방 사헌 개성부사(領重房司憲開城府事)에 임명되고, 1386년(우왕 12)에는 다시 좌시중이 되었다가 이듬해 노병으로 사직하였다.
그런데 1388년 염흥방의 가노(家奴) 이광(李光)이 주인의 권세를 배경으로 전직 밀직부사 조반(趙胖)의 토지를 빼앗자 이에 격분한 조반이 이광을 죽이니 염흥방이 조반을 국가모반죄로 몰아 순군(巡軍)에 가두고 심하게 고문시킨 사건을 계기로, 그동안 기회를 엿보던 우왕‧최영‧이성계 등이 오히려 염흥방‧임견미‧왕복해(王福海) 등을 처단하고 그 일파를 유배시켰는데, 이때 이인임도 경산부로 옮겨졌다가 곧 죽었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高麗 禑王代의 政治權力의 性格과 그 推移(朴天植, 全北史學 4, 1980)
李仁任政權에 對한 一考察(高惠玲, 歷史學報 91, 1981)
高麗史節要
高麗 禑王代의 政治權力의 性格과 그 推移(朴天植, 全北史學 4, 1980)
李仁任政權에 對한 一考察(高惠玲, 歷史學報 91, 1981)
[집필자]
고혜령(高惠玲)
명 : "인임(仁任)"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
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