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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이장(朴而章)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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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숙빈(叔彬)
호(號)도천(道川)
생년1547(명종 2)
졸년1622(광해군 14)
시대조선중기
본관순천(順天)
활동분야문신 > 문신
박양좌(朴良佐)
저서『용담집』
저서『정서절요(程書節要)』
저서『육경여해(六經蠡海)』

[상세내용]

박이장(朴而章)
1547년(명종 2)∼1622년(광해군 1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숙빈(叔彬), 호는 용담(龍潭)도천(道川). 승지 박양좌(朴良佐)의 아들이다.

어려서 가학(家學)을 수업하고, 23세에 조식(曺植)을 찾아 덕산(德山)에 갔으며, 1572년(선조 5) 향시(鄕試)에, 이듬해 회시(會試)에 합격하였다.

1574년 노수신(盧守愼)을 찾아가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였다. 한때 영숭전참봉(永崇殿參奉)으로 나아갔으나 곧 사직하고 돌아와 학문에 몰두하였다.

1586년 별시문과에 갑과로 합격하여 승문원정자홍문관수찬교리 등을 지내고 1591년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를 다녀왔다. 임진왜란 때 김성일(金誠一)의 주청으로 종사관이 되어 크게 활약하였다.

1593년 10월 사헌부지평지제교정언을 지내고 다음해 이조좌랑, 이어서 세자시강원사서를 겸직하였다.

1595년 이조정랑부응교를 거쳐 1599년 사간집의에 있을 때에 홍여순(洪汝諄)을 탄핵하였다.

1601년 성균관전적상의원정을 지내고 이듬해 집의홍문관직제학 겸 시강원보덕동부승지참찬관을 역임하였다. 이 당시 유영경(柳永慶)파인 소북(小北)으로 반대세력을 비방, 탄핵하였다.

1603년 동지정사(冬至正使)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고, 대사헌이조참판부제학을 지냈다.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정인홍(鄭仁弘)을 논계하였다.

이듬해 대사간이 되고, 이어 동지춘추관사대사성을 거쳐 다시 대사간이 되었다.

1615년 폐모론이 일어나자 이를 반대하는 만언소(萬言疏)를 올렸다가 삭직되었다.

그뒤 성주로 내려가 저술과 후진양성에 힘썼다. 경상도 초계(草溪)에서 죽었다. 문장에 능하였으며, 특히 시에 이름이 있었다.

저술로는 『용담집』『정서절요(程書節要)』『육경여해(六經蠡海)』가 있다. 성주청천서원(晴川書院)에 제향되었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光海君日記
龍潭集
燃藜室記述

[집필자]

김철희(金喆熙)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