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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李舜臣)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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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여해(汝諧)
시호(諡號)충무(忠武)
봉호덕풍부원군(德豊府院君)
생년1545(인종 1)
졸년1598(선조 31)
시대조선중기
본관덕수(德水)
활동분야무신 > 명장
이정(李貞)
조부이백록(李百祿)
증조부이거(李琚)
외조부변수림(卞守琳)
이희신(李羲臣)
이요신(李堯臣)
이우신(李禹臣)
출생지서울 건천동
제향충렬사(忠烈祠)
제향충민사(忠愍祠)
제향현충사(顯忠祠)
공신선무공신(宣武功臣)

[상세내용]

이순신(李舜臣)
1545년(인종 1)∼1598년(선조 31). 조선 중기의 명장. 자는 여해(汝諧)(주1)
『국조인물지(國朝人物志)』 2권 "이순신" 항목 참고.
. 본관은 덕수(德水).

부친은 이정(李貞)이며, 모친은 초계변씨(草溪卞氏)변수림(卞守琳)의 딸이다. 서울 건천동(乾川洞)에서 출생하였다.
1. 가계
그의 가계는 고려중랑장을 지낸 이돈수(李敦守)로부터 내려오는 문반(文班)의 가문으로, 이순신은 그의 12대손이 된다. 5대조인 이변(李邊)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홍문관대제학을 지냈고, 증조부 이거(李琚)병조참의에 이르렀다. 조부는 이백록(李百祿)이다. 형제로는 이희신(李羲臣)이요신(李堯臣)의 두 형과 아우 이우신(李禹臣)이 있다. 이 이름은 돌림자인 신(臣)자 위에 삼황오제(三皇五帝) 중에서 복희씨(伏羲氏)요(堯)순(舜)우(禹)의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이다. 그의 시골 본가는 충청남도 아산군 염치면 백암리이나, 생가인 서울 건천동에서 자랐다.
2. 출사와 관직
28세에 훈련원별과(訓鍊院別科)에 응시하였으나 말에서 떨어져서 실격하였다. 1576년(선조 9) 식년무과에 병과로 급제하여(주2)
무과급제
고려대학교 소장 『병자 식년 문무과 방목(丙子式年文武科榜目)』 참고.
권지훈련원봉사(權知訓鍊院奉事)로 관직에 나갔으며, 이어 함경도동구비보권관(董仇非堡權管)에 보직되고, 이듬해에 발포수군만호(鉢浦水軍萬戶)를 거쳐, 1583년 건원보권관(乾原堡權管)훈련원참군(訓鍊院參軍)을 역임하고, 1586년에는 사복시주부가 되었다. 이어 조산보만호 겸 녹도둔전사의(造山堡萬戶兼鹿島屯田事宜)가 되었는데, 이때 그는 국방의 강화를 위하여 군사를 더 보내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들어주지 않던 차에 호인(胡人)의 침입을 받고 적은 군사로 막아낼 수 없어 피하였다. 조정은 그것이 그의 죄라 하여 문책하였다. 그는 중형을 면하기는 하였으나, 첫번째로 백의종군(白衣從軍)하게 되었다.

그뒤 전라도관찰사 이광(李洸)에게 발탁되어 전라도조방장(助防將)선전관 등이 되고, 1589년 정읍현감으로 있을 때 유성룡의 추천으로 고사리첨사(高沙里僉使)로 승진, 이어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만포첨사(滿浦僉使)진도군수 등을 지내고, 47세가 되던 해에 전라좌도수군절도사가 되었다. 그는 왜침에 대비하여 좌수영(左水營)에서 전선(戰船)을 건조하고 군비를 확충하였다.
3. 임진왜란 발발
1592년 4월 14일 임진왜란이 발발했는데, 이 소식이 전라좌수영에 전달된 것은 이틀 뒤였다. 이날은 국기일(國忌日)이었으므로 그는 공무를 보지 않고 있었는데, 해질 무렵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으로부터 왜선 350여 척이 부산에 정박중이라는 통보에 이어 부산과 동래가 함락되었다는 급보가 들어왔다. 그때 부산 앞바다의 방어를 맡은 경상좌수영의 수군은 왜군을 공격하지도 않았고, 경상좌수사 박홍(朴泓)은 부산이 함락된 뒤 군사를 이끌고 동래 방면에 도착하였으나 동래가 함락되는 것을 보고는 육지로 도망하였다. 또, 거제도에 근거를 둔 원균은 적과의 접전을 회피함으로써 일본군은 조선수군과 한번 싸우지도 않고 제해권을 장악하였다. 소식을 들은 이순신은 전선을 정비하는 한편, 전황을 면밀히 분석한 후, 5월 2일 기함에 승선하였다.
4. 옥포대첩
4일 새벽 전선 24척, 협선(狹船) 15척, 포작선(鮑作船) 46척의 대선단을 이끌고 출항하였다. 이틀 뒤 한산도(閑山島)에 이르러 원균의 선단을 만났다. 원균의 선단은 전선 3척과 협선 2척에 불과하였으나 연합함대를 조직하지 않을 수 없었다. 7일 옥포(玉浦) 앞바다를 지날 무렵 30여척의 적선을 발견하였다. 왜군은 육지에서 약탈을 하다가 급히 배에 올라 도망하려 하였으나 조선수군의 포화와 화시(火矢)에 26척이 격파되고 많은 왜병이 궤멸되었다. 이 싸움은 그의 최초의 해전으로 기록된다.
5. 노량대첩
옥포해전 다음날 고성적진포(赤珍浦)에 정박중인 왜선 13척을 불태웠다. 전력과 전선을 정비한 뒤 기다리던 그는 일본수군 주력함대가 서쪽으로 나아간다는 정보가 들어오자,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에게 합동하여 왜선을 격파할 것을 제의하였다. 그러나 원균으로부터 왜선 10여 척이 사천곤양 등지로 진출하였다는 보고를 받고 출동일을 변경하여 선제공격 하기로 하였다. 5월 29일 거북선을 앞세우고 여수를 출항하였다. 노량(露梁) 앞바다에 이르러 전선 3척을 인솔하고 있던 원균이 와서 적의 상황을 설명하였다. 조선수군은 일본수군이 정박중인 사천으로 달려갔다. 왜군은 대부분 상륙하여 있었고 해변에는 왜선 12척이 있었다. 그는 공격이 용이하지 않자 그들을 바다로 유인하여 왜선 12척을 파괴하고 많은 왜군을 섬멸하였다. 이 싸움에서 군관(軍官) 나대용(羅大用) 등이 부상하였고, 그도 적의 조총탄에 맞아 왼쪽어깨에 부상을 입었다. 이 싸움에서 최초로 출동한 거북선의 위력이 인정을 받았다.
6. 당항포대첩
6월 2일 왜선이 당포(唐浦)에 정박중이라는 보고를 받은 그는 곧 그곳으로 달려갔다. 당포선창에는 일본수군장 가메이(龜井玆矩)구루시마(來島通元)가 인솔하는 대선 9척, 중‧소선 12척이 정박하고 성 안팎에서 방화와 약탈을 자행하다 조선수군을 보고 발포하였으나 거북선을 앞세운 조선수군의 맹렬한 공격에 왜장 구루시마가 전사하였다. 며칠 후 전라우수사 이억기가 합류하였다. 5일 아침 연합함대는 거제로 향하였다. 이때 피난민으로부터 첩보를 듣고 연합함대는 당항포로 향하였다. 당항포 내만(內灣)에는 왜의 대선 9척, 중선 4척, 소선 13척이 정박중이었다. 조선수군을 발견한 일본수군은 먼저 공격을 가해왔다. 아군의 전선들은 적선을 포위하고 맹공을 가하였다. 이 싸움에서 왜군은 대패하였고 왜선은 모두 소실되었다. 이 공로로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승품(陞品)되었다.
7. 한산대첩
그뒤 그는 다시 선제공격으로 거제가덕의 일본수군을 격멸하기 위하여 우수사 이억기와 연합함대를 조직하였고, 7월 6일 전라좌‧우수군이 출동하여 노량해상에서 경상우수사 원균의 전선 7척과도 합세하였다. 이때 일본군은 패배를 만회하기 위하여 견내량(見乃梁)에 적장 와키사카(脇坂安治) 등이 인솔한 대선 36척, 중선 24척, 소선 13척이 정박하고 있었다. 그는 견내량이 지형이 좁고 활동이 불편하다는 판단 아래 약간의 판옥선(板屋船)으로 일본의 수군을 공격하면서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한 뒤 학익진(鶴翼陣)을 쳐 일제히 총통(銃筒)을 발사하는 등 맹렬한 공격을 가하여 층각선(層閣船) 7척, 대선 28척, 중선 17척, 소선 7척을 격파하였다. 이 싸움에서 와키사카사베에(脇坂左兵衛)와타나베(渡邊七右衛門)를 위시하여 이름있는 일본 장수들이 전사하였다. 그는 이 공으로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승계(陞階)하였다.
8. 부산포대첩
한산대첩 후 그는 안골포(安骨浦)의 적선을 격파하였다. 와키사카와 합동작전을 하려던 구키(九鬼嘉隆)가토(加藤嘉明) 등의 일본 수군장은 와키사카의 수군이 전멸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안골포에 정박중이었다. 그는 적선을 유인하여 공격하려 하였으나 나오지 않자, 하루 종일 교대로 공격하여 대선을 거의 파괴하였다. 그는 3차출동의 결과 가덕도 서쪽의 제해권을 장악한 후 부산포 공격의 결단을 내렸다. 전라좌‧우도의 연합함대가 9월 1일 오전 절영도(絶影島)에 이르렀을 때, 왜선 수척이 연합함대를 보고 도주하였다. 절영도에서는 수척의 적선을 부순 후 척후선을 부산포에 보내어 탐지한 결과, 왜선 약 500척이 해안에 정박해 있고 대선 4척이 초량(草梁)으로 나오고 있음을 알았다. 적이 부산포를 요새화한 것을 알게 된 여러 장수들은 깊이 들어가기를 꺼렸으나, 그는 진격을 재촉하였다. 우부장(右部將) 정운(鄭運) 등이 선두에 서서 왜대선 4척을 공격하여 불사르니, 뒤에 있던 전선들도 함께 돌진하였다. 정박중인 일본수군은 나오지 못하고 있다가 아군이 공격하자, 모두 산으로 올라가 아군에게 총통과 화전을 쏘았다. 아군은 이에 맞서 더욱 맹공을 가하며 종일토록 교전하여 적선 100여척을 격파하였다. 이 싸움에서 적의 피해는 말할 수 없이 컸으며, 아군도 이 해전에서 30여명의 사망자를 냈고 특히 녹도만호(鹿島萬戶) 정운이 전사하였다.
9. 정유재란과 실각
1593년 다시 부산과 웅천의 적 수군을 궤멸, 남해안 일대의 적군을 완전히 소탕하고 한산도로 본영을 옮겼다. 그뒤 최초로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가 되었다. 이듬해 명나라 수군이 파병되어 오자, 죽도(竹島)에 진을 옮기고, 이어 장문포(長門浦)에서 왜군을 격파하여 서해안 진출을 막았다. 그뒤 명나라와 일본간의 강화회담이 진행되면서 전쟁이 소강상태에 들어가자, 그는 군사훈련, 군비확충, 산업장려 등에 힘썼다. 1597년 회담이 깨어지고 정유재란이 일어났다. 그런데 왜장 고니시(小西行長)의 부하이며 이중간첩인 요시라(要時羅)경상우병사 김응서(金應瑞)에게 가토(加藤淸正)가 바다를 건너올 것이니 수군을 시켜 사로잡을 것을 조선 조정에 은밀히 알려왔다. 조정에서는 이순신에게 이를 실행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런데 이순신이 출동하였으나, 가토는 이미 서생포(西生浦)에 들어온 뒤였다. 이때, 경상우수사 원균은 이순신이 왕명을 어겼다고 모함하는 상소를 올렸다. 상소를 받은 선조는 원균의 상소만을 믿고 이순신이 명령을 어기고 출전을 지연하였다는 죄를 들어 그에게 벌을 주고 원균으로 하여금 그 직을 대신하게 하였다. 한양으로 압송된 그에게 가혹한 고문이 가해졌다. 그러나 그는 자초지종을 고하였고, 죽음 직전에서 그는 우의정 정탁(鄭琢)의 변호로 목숨을 건지고 도원수 권율(權慄)의 밑에서 두 번째 백의종군을 하게 되었다. 남해안으로 향하던 도중 어머니의 부고를 받고 잠시 들러 성복(成服)을 마친 다음 다시 남쪽으로 향하였다. 그해 7월 원균이 적의 유인에 빠져 거제 칠천량(漆川洋)에서 전멸됨으로써 이순신이 길러온 함대는 궤멸되었다.
10. 재기용과 명량해전
원균의 패배 소식이 조정에 알려지자, 다시 이순신통제사로 기용하였다. 재임용된 그는 남해 등지를 두루 살폈으나 남은 군사 120인에 병선은 고작 12척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실망하지 않고 수전에서 적을 맞아 싸울 것을 결심하였다. 명량해전(鳴梁海戰)에 앞서 장병에게 필승의 신념을 일깨운 다음, 9월 16일 12척의 전선과 빈약한 병력을 거느리고 명량에서 133척의 적군과 전투를 벌여 적선 31척을 부수는 전과를 올렸다. 이 싸움은 재차 통제사로 부임한 뒤의 최초의 대첩이며, 사기가 꺽인 조선 수군을 재기시키는 데 결정적인 구실하였다. 그는 다시 제해권을 다시 장악한 후 보화도(寶花島: 목포의 高下島)를 본거로 삼았다가, 다음해 2월에 고금도(古今島)로 군영을 옮겼고, 백성들을 모집하여 둔전을 경작시켰다. 장병과 난민(難民)이 모여들어 군진(軍鎭)의 위용도 예전 한산도 시절에 비하여 10배를 능가할 정도로 성세를 이루었다. 이렇듯 단시일에 제해권을 회복하고 수군을 재기시킬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그의 개인적 능력에 의한 것이었다.
11. 노량해전과 순국
1598년 11월 19일, 노량에서 퇴각하기 위하여 집결한 500척의 적선을 발견하고 명나라 수군제독 진린(陳璘)과 같이 공격하였다. 그러나 그는 후퇴하는 적선을 향하여 맹공을 가하다 도중에 유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그러나 아들과 휘하 장수들은 계속 전투를 하여 왜군을 대파하였다.
12. 사후의 존숭
사후 1604년 선무공신(宣武功臣) 1등에 녹훈되고 덕풍부원군(德豊府院君)에 추봉되었으며,(주3)
덕풍부원군추봉
『국조인물지(國朝人物志)』 2권 "이순신" 항목 참고.
좌의정에 추증, 1793년(정조 17) 다시 영의정이 더해졌다. 묘는 충청남도 아산시 음봉면 어라산(於羅山)에 있으며, 왕이 지은 비문과 충신문(忠臣門)이 건립되었다. 충무의 충렬사(忠烈祠), 순천충민사(忠愍祠), 아산현충사(顯忠祠) 등에 제향되었다. 현충사는 고장 유생들의 상소에 따라 1707년(숙종 33)에 건립되었다. 일제강점기 때에 동아일보사 주도로 전국민의 성금을 모아 보수하였고, 제3공화국 때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지시로 성역화되고 유품 전시관이 마련되었다.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저서로는 『난중일기』, 『이충무공전서』가 전한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宣祖修正實錄
西厓集
燃藜室記述
亂中雜錄
李忠武公全書
宣廟中興誌
亂中日記草
懲毖錄
明史
脇坂家傳記
The Influence of the Sea on the Political History of Japan(G. A. Ballard, New York, E. P. Company, 1921)
忠武公縱橫談(李殷相, 思想界, 1955)
聖雄李忠武公論(千寬宇, 韓國史의 再發見, 一潮閣, 1974)
李舜臣(崔永禧, 韓國의 人間像 2, 新丘文化社, 1973)
李舜臣(崔碩男, 韓國人物大系 3, 博友社, 1972)
文化財大觀―史蹟篇下―(文化財管理局, 1976)

[집필자]

이장희(李章熙)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