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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李洸)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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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사무(士武)
호(號)우계산인(雨溪散人)
생년1541(중종 36)
졸년1607(선조 40)
시대조선중기
본관덕수(德水)
활동분야문신 > 문신
이원상(李元祥)
조부이행(李荇)
저서『우계집』

[상세내용]

이광(李洸)
1541년(중종 36)∼1607년(선조 4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사무(士武), 호는 우계산인(雨溪散人). 좌의정 이행(李荇)의 손자이며, 도사 이원상(李元祥)의 아들이다.

1567년(명종 22) 생원이 되고, 1574년(선조 7)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어 권지성균관학유의정부사록을 거쳐, 1577년 예문관검열이 되어 춘추관기사관을 겸하였다.

그뒤 평안병마평사성균관전적병조좌랑정언형조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1582년 예조정랑지평에 이어 이듬해 성균관직강북청판관함경도도사를 지냈다.

1584년 병조정랑장악원첨정을 거쳐, 함경도암행어사로 나가 북도민의 구호현황을 살피고 돌아와서 영흥부사가 되었다.

1586년 길주목사로 나갔다가 함경도관찰사순찰사로 승진되었다.

1589년 전라도관찰사가 되었으며, 그해 겨울 모역한 정여립(鄭汝立)의 문생과 그 도당을 전부 잡아들이라는 영을 어기고, 혐의가 적은 인물을 임의로 용서하여 풀어주었다가 탄핵을 받고 삭직되었다.

1591년 호조참판으로 다시 기용되었으며, 곧 지중추부사로서 전라도관찰사를 겸임하였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감사로서 충청도관찰사 윤선각(尹先覺), 경상도관찰사 김수(金睟)와 함께 관군을 이끌고 북상하여 서울을 수복할 계획을 세웠으며, 5월에 최원(崔遠)에게 전라도를 지키게 하고, 스스로 4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나주목사 이경복(李慶福)중위장으로 삼고, 조방장(助防將) 이지시(李之詩)를 선봉으로 하여 임천(林川)을 거쳐 전진하였다.

그러나 도중 용인의 왜적을 공격하다가 적의 기습을 받아 실패하였다.

그뒤 다시 전라도로 돌아가서 왜적이 전주금산 지역을 침입하자, 광주목사(光州牧使) 권율(權慄)도절제사로 삼아 웅치(熊峙)에서 적을 크게 무찌르고, 전주에 육박한 왜적을 그 고을 선비 이정란(李廷鸞)과 함께 격퇴시켰다.

같은해 가을 용인패전의 책임자로 대간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어 백의종군한 뒤 의금부에 감금되어 벽동군으로 유배되었다가 1594년(선조 27) 고향으로 돌아왔다.

저서로는 『우계집』이 있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燃藜室記述
國朝人物考

[집필자]

이장희(李章熙)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