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치검색 표제어 전체
검색
정세아(鄭世雅)

[요약정보]

UCIG002+AKS-KHF_13C815C138C544B1535X0
자(字)화숙(和叔)
호(號)호수(湖叟)
시호(諡號)강의(剛義)
생년1535(중종 30)
졸년1612(광해군 4)
시대조선전기
본관영일(迎日)
활동분야호국 > 의병
정윤량(鄭允良)
5대조정종소(鄭從韶)

[상세내용]

정세아(鄭世雅)
1535년(중종 30)∼1612년(광해군 4).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화숙(和叔), 호는 호수(湖叟).

영천(永川)에서 세거(世居)하였다. 사성 정종소(鄭從韶)의 현손으로, 정윤량(鄭允良)의 아들이다.

1558년(명종 13)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사족(士族)으로 향촌의 자제들을 동원하여 편대를 정하고 격문을 작성하여 의병을 규합, 900여명을 모집하여 의병대장이 되었다.

그때 곽재우(郭再祐)의령에서, 권응수(權應銖)신령에서 각각 기병하여 서로 성원하였다.

그해 8월 권응수의 지휘 아래 영천 의병장 정대임(鄭大任)정천뢰(鄭天賚)조성(曺誠)신해(申海) 등과 함께 영천 박연(朴淵)에서 왜적과 싸워 큰 전과를 거두고 영천성을 수복하였으나, 전공포상은 받지 못하였다. 영천성을 수복한 데 이어 다시 경주의 왜적을 격퇴하니, 이로 인하여 낙동강 왼쪽이 온전하였다.

이듬해 평양서울이 차례로 수복되자 군사를 조희익(曺希益)에게 맡기고 자양(紫陽)으로 돌아갔다. 체찰사 이원익(李元翼)에 의하여 여러 번 천거되었으나 사양하였고, 나중에 황산도찰방(黃山道察訪)을 잠시 지내고 곧 사직하였다.

장현광(張顯光)조호익(曺好益)이준(李埈) 등과 학문을 토론하며 후진을 양성하였다.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영천환고사(環皐祠)에 봉향되었으며, 그에 대한 『호수실기』가 있다. 시호는 강의(剛義)이다.

[참고문헌]

宣祖修正實錄
正祖實錄
嶺南人物考
永川邑誌
壬辰戰亂史
湖叟實記
慶尙北道史 上(慶尙北道史編纂委員會, 1983)

[집필자]

이수건(李樹健)
대표명정세아(鄭世雅)
세아(世雅)
성명정세아(鄭世雅)
화숙(和叔)
호수(湖叟)

호 : "호수(湖叟)"에 대한 용례

전거용례
湖叟實記卞破錄v1病免生員曺希益 代領其衆云而取考崔公本記曰吾以疲於兵革因病辭免曺希益代領其衆云鄭氏 之以崔公之吾歸之湖叟不亦甚乎往在壬辰運石時崔公本孫二人以崔公日記來示之且曰先祖叅判公手草日記曾爲涵溪▣丈借去因而不還故本
湖叟實記卞破錄v1慕功猜賢則大事去矣明日悉以權某 言言于世雅世雅 曰交疎言切恐或生嫌云未知猜賢之賢豈鄭叅判 自道語耶指湖叟 語耶悉以權某 言云爾則權某 言必多而何不采入於行錄中也雖然鄭叅判行錄旣非本家信筆則又何必多卞也
湖叟實記卞破錄v1者不知爲幾許年而迺於辛巳出於環邱世德祠取而觀之則紙非古紙墨不渝色而錄中措辭一切換面呼賓作主隱然推重於湖叟 其出於後人之手者無疑而乃諉之以叅判公孫以頀 氏所撰云今觀其實記所引則此條在於鄭一鑽 追得補八中若使
湖叟實記卞破錄v1公世雅字和叔永川人生於嘉靖乙未官至察訪止龍蛇之難倡義全城及論功退讓不居先生與之遊好云而取考申公本錄有湖叟 父鄭魯村允良 而無湖叟 姓諱鄭氏 所謂敍述類多如此何足取信邪
湖叟實記卞破錄v1靖乙未官至察訪止龍蛇之難倡義全城及論功退讓不居先生與之遊好云而取考申公本錄有湖叟 父鄭魯村允良 而無湖叟 姓諱鄭氏 所謂敍述類多如此何足取信邪
湖叟實記卞破錄v1以餘兵登馬峴山乘風飛沙且觀鄭氏 所謂復城圖鄭公手大將旗立于馬峴山上而其年譜曰先犯東南隨出隨斬噫是何一湖叟 之多也一入賊中一登馬峴山一則先犯東南此皆同時事也鄭公 雖賢若是神勇邪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