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대임(鄭大任)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815B300C784B1553X0 |
자(字) | 중경(重卿) |
호(號) | 창대(昌臺) |
생년 | 1553(명종 8) |
졸년 | 1594(선조 27)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영일(迎日) |
활동분야 | 호국 > 의병 |
부 | 정정용(鄭鄭容) |
증조부 | 정윤식(鄭允湜) |
외조부 | 김응생(金應生) |
출신지 | 영천 |
공신호 |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
[상세내용]
정대임(鄭大任)
1553년(명종 8)∼1594년(선조 27). 조선 중기의 의병장. 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중경(重卿), 호는 창대(昌臺). 영천 출신.
부친은 정용(鄭容)이며, 모친은 증참판 김응생(金應生)의 딸이다. 증조부 정윤식(鄭允湜)에게 수학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당지산(唐旨山)에서 복병으로 적을 크게 무찌르고 이어 7월에 영천전투에 참가, 의병 100여명을 이끌고 의병대장 권응수(權應洙)의 휘하에 들어가 중총(中摠)의 직책을 맡고 활약하였다.
그뒤 영천에서 신령으로 이동하는 적군을 권응수와 함께 요격, 박연(朴淵)에서 대승하고 영천수복에 공을 세웠다.
용궁‧비안의 전투에서도 다수의 적을 참획(斬獲)하고 병사 박진(朴晉)과 함께 경주탈환전에 용명을 떨쳤다.
이듬해 태화강(太和江)의 적군을 공격, 종일 역전하여 많은 전과를 올린 공으로 1593년 비안현감‧훈련원첨정‧예천현감‧경상좌도병마우후를 역임하였다.
1594년 무과에 급제, 승품(陞品)되기도 전에 적군과 싸우다가 죽었다.
그뒤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2등에 녹훈되고, 가선대부(嘉善大夫)‧호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에 추증되었다.
창대서원(昌臺書院)에 제향되었으며, 공산회맹(公山會盟) 때 창화한 시 한수가 전한다.
부친은 정용(鄭容)이며, 모친은 증참판 김응생(金應生)의 딸이다. 증조부 정윤식(鄭允湜)에게 수학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당지산(唐旨山)에서 복병으로 적을 크게 무찌르고 이어 7월에 영천전투에 참가, 의병 100여명을 이끌고 의병대장 권응수(權應洙)의 휘하에 들어가 중총(中摠)의 직책을 맡고 활약하였다.
그뒤 영천에서 신령으로 이동하는 적군을 권응수와 함께 요격, 박연(朴淵)에서 대승하고 영천수복에 공을 세웠다.
용궁‧비안의 전투에서도 다수의 적을 참획(斬獲)하고 병사 박진(朴晉)과 함께 경주탈환전에 용명을 떨쳤다.
이듬해 태화강(太和江)의 적군을 공격, 종일 역전하여 많은 전과를 올린 공으로 1593년 비안현감‧훈련원첨정‧예천현감‧경상좌도병마우후를 역임하였다.
1594년 무과에 급제, 승품(陞品)되기도 전에 적군과 싸우다가 죽었다.
그뒤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2등에 녹훈되고, 가선대부(嘉善大夫)‧호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에 추증되었다.
창대서원(昌臺書院)에 제향되었으며, 공산회맹(公山會盟) 때 창화한 시 한수가 전한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燃藜室記述
嶺南人物考
永川邑誌
昌臺鄭公實記
燃藜室記述
嶺南人物考
永川邑誌
昌臺鄭公實記
[집필자]
김석희(金錫禧)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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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