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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李埈){1}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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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숙평(叔平)
호(號)창석(蒼石)
시호(諡號)문간(文簡)
생년1560(명종 15)
졸년1635(인조 13)
시대조선중기
본관흥양(興陽)
활동분야문신 > 문신
이수인(李壽人)
저서『창석집』

[상세내용]

이준(李埈)
1560년(명종 15)∼1635년(인조 1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흥양(興陽). 자는 숙평(叔平), 호는 창석(蒼石).

이수인(李壽人)의 아들이다.

유성룡(柳成龍)의 문인으로, 1582년(선조 15) 생원시를 거쳐 1591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교서관정자가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피난민과 함께 안령에서 적에게 항거하려 하였으나 습격을 받아 패하였으며, 그뒤 정경세(鄭經世)와 함께 의병 몇천명을 모집하여 고모담(姑姆潭)에서 외적과 싸웠으나 또다시 패하였다.

1594년 의병을 모아 싸운 공으로 형조좌랑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이듬해 경상도도사가 되었으며, 이때 중국 역대 왕들의 덕행과 신하들의 정사(正邪)를 밝힌 『중흥귀감(中興龜鑑)』을 지어 왕에게 바쳤다. 당시 정인홍(鄭仁弘)이 세력을 키워 많은 사람들을 주위에 모았으나 가담하지 않았다.

1597년 지평이 되었으나 유성룡(柳成龍)의 국정운영에서의 잘못 등으로 인하여 공격을 받을 때 함께 탄핵을 받고 물러났다. 같은해 가을 소모관(召募官)이 되어 의병을 모집하고 군비를 정비하는 등 방어사(防禦使)와 협력하여 일하였다. 이어 예조정랑단양군수 등을 거쳐, 1603년 수찬으로 불려들어와 형조공조정랑을 거쳤다.

1604년 주청사(奏請使)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광해군제용감정(濟用監正)을 거쳐, 교리로 재직중 대북파의 전횡이 심해지고, 특히 1611년(광해군 3) 정인홍이황(李滉)이이(李珥)를 비난하자 그에 맞서다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정국이 바뀌자 다시 교리로 등용되었다. 인조 초년 이귀(李貴) 등 반정공신을 비롯한 서인 집권세력이 광해군의 아들 폐세자(廢世子)를 죽일 때, 은혜를 베풀 것을 적극적으로 주장하다가 철원부사로 밀려났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군대를 모아 의승군(義勝軍)이라 이름하였으며, 그뒤 부응교응교집의전한사간 등 삼사의 관직을 각각 여러 차례 역임하였다.

이즈음 왕권에 위협이 된다 하여 집권 서인세력이 선조의 아들인 인성군(仁城君) 공(珙)을 죽이려 하자 남인의 일원으로서 반대의견을 주도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하였고, 조도사(調度使)에 임명되어 곡식을 모았으나 화약이 맺어지자 수집한 1만여섬의 군량을 관에 인계하였다. 이 공으로 첨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다.

1628년 승지가 되고 1634년 대사간을 거쳐, 이듬해 부제학에 임명되었다. 선조대에서 인조대에 이르는 복잡한 현실 속에서 국방과 외교를 비롯한 국정에 대하여 많은 시무책(時務策)을 제시하였으며, 정경세와 더불어 유성룡의 학통을 이어받아 당시의 학계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또한, 정치적으로는 남인세력을 결집하고, 그 여론을 주도하는 중요한 소임을 하였다. 상주옥성서원(玉城書院)풍기우곡서원(愚谷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창석집』을 남겼으며, 『형제급난지도(兄弟急難之圖)』를 편찬하였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國朝榜目

[집필자]

조성도(趙成都)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