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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李墍)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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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가의(可依)
호(號)송와(松窩)
시호(諡號)장정(莊貞)
생년1522(중종 17)
졸년1600(선조 33)
시대조선전기
본관한산(韓山)
활동분야문신 > 문신
이지란(李之蘭)

[상세내용]

이기(李墍)
1522년(중종 17)∼1600년(선조 33).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가의(可依), 호는 송와(松窩). 이지란(李之蘭)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시서에 능하였고, 생원시에 이어 1555년(명종 10)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565년 장령, 1567년 수찬을 역임한 뒤 전한이 되어 편수관으로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뒤 1571년(선조 4) 직제학이 되었으며, 이듬해 좌승지에 올랐으나 노모가 원주에서 병으로 눕자 이를 봉양하기 위하여 사직을 청하였다.

그러자 노모를 봉양하도록 1573년에는 강원도관찰사에 제수되었고, 이듬해 중앙으로 돌아와 우승지가 되었다.

1578년 다시 양주목사로 내려갔는데, 이때 선정을 베풀었다는 사실이 경기감사에 의하여 조정에 보고되었다.

1583년 다시 중앙으로 돌아와 부제학을 역임한 뒤 장흥부사를 거쳐 1591년 대사간이 되었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순화군(順和君) 를 보필하면서 강원도에 내려가 의병을 모집하였다.

1595년 다시 부제학이 되고, 이듬해 대사간대사헌동지중추부사를 차례로 역임한 뒤 이조판서에 올랐다.

1597년 다시 지중추부사대사헌지돈녕부사예조판서 등을 차례로 역임한 뒤 1599년 다시 대사헌이 되고, 이어 예조판서이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이듬해 지돈녕부사를 끝으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죽은 뒤 1603년에 2품 이상 재신을 청백리로 뽑는 데 녹선되었고, 그뒤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그가 대사헌으로 있을 때 종로 네거리를 지나는데 말이 너무 말라 가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그러나 그는 개의하지 않고 소리를 지르며 앞으로 나아갔는데, 그뒤에 사람들이 말이 피곤하여 땅에 주저앉는 것을 보면 ‘대사헌의 말’이라고 일컬었다 한다. 그는 이와같이 청빈하여 한사(寒士)나 다름없이 벼슬생활을 하였다. 시호는 장정(莊貞)이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宣祖修正實錄
國朝榜目
樊巖集

[집필자]

유병용(兪炳勇)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