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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벽(權擘)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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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대수(大手)
호(號)습재(習齋)
생년1520(중종 15)
졸년1593(선조 26)
시대조선전기
본관안동(安東)
활동분야문신 > 문신
권기(權祺)
청풍김씨(淸風金氏)
외조부김세영(金世英)
공신호광국원종공신(光國原從功臣)

[상세내용]

권벽(權擘)
1520년(중종 15)∼1593년(선조 26).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대수(大手), 호는 습재(習齋).

부친은 좌승지 권기(權祺)이며, 모친은 청풍김씨(淸風金氏)목사 김세영(金世英)의 딸이다. 시인 권필(權韠)의 아버지이다.

1543년(중종 38) 진사시에 합격하고 같은해 식년문과에 급제,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을 거쳐 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에 발탁되었는데, 이때에 안명세(安名世)윤결(尹潔) 등 청류 선비들과 교유를 즐겼다.

그러나 두 사람이 당시 윤임(尹任) 등과 친하며 윤원형(尹元衡) 일파를 공박한 것으로 을사사화에 화를 입자 모든 교유를 끊고 오로지 학문에만 힘썼다.

명종이 즉위하자 예조참의장례원판결사(掌隷院判決事)를 역임하고 춘추관기주관(春秋館記註官)이 되어 『중종실록』『인종실록』『명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문(吏文)에 밝아 행정실무에 능하였고, 서장관(書狀官)동지사로 두번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원접사(遠接使)가 되기도 하였다. 외직으로는 성주목사장단부사를 거쳐 안변부사가 되었다가 순무어사 허봉(許篈)의 탄핵으로 체직되었다.

그뒤 대호군오위장강원도관찰사를 역임하며 선정을 폈다.

시문이 높은 경지에 이르러 승문원부제조제조(提調)지제교(知製敎)를 오랫동안 지내며 문한(文翰)을 주관하였는데, 특히 명나라에 오가는 외교문서를 전담하였다.

1572년(선조 5) 김성일(金誠一) 등과 함께 완의록(完議錄)에 올랐고 광국원종공신(光國原從功臣)에 봉해졌다. 한시에 능하여 많은 사람들이 그의 시를 즐겼으며, 당대의 명사인 노수신(盧守愼)정유길(鄭惟吉) 등도 그의 시문을 높이 평가하였다.

50여년간 벼슬을 하는 동안 가사를 돌보지 않고 자식의 혼사도 모두 부인에게 맡겨버렸으며, 손님도 거의 맞지 않으면서 오직 시에만 마음을 쏟아 높은 경지를 이룩하였다. 예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저서로는 『습재집』 8권이 있다.

[참고문헌]

中宗實錄
宣祖實錄
國朝人物考
國朝榜目

[집필자]

최완기(崔完基)
대표명권벽(權擘)
벽(擘)
성명권벽(權擘)
대수(大手)
습재(習齋)

명 : "벽(擘)"에 대한 용례

전거용례
野乘v10抄他日開板壽後須使此人㨂選尹月汀根壽擘問近世文章高下人言新進文士中柳某能文章甚高云其文與崔東臯岦孰優曰岦之文模倣古人之作雖工非自家造化若夢寅之文不擬前人模範皆出胷中變化此最難處崔殆不及也且余曽聞車五山
野乘v10墻之文近科程舉子軆李奎報之文痿弱不及其詩賦而稍喜其詩與余詩軆貌相類申玄翁欽一生攻文被謫後藻鑑益明權鞈之子也亦有文鑑皆以余詩文東方無可比肩獨李奎報之詩相上下車雲輅天輅之弟也深於文章示余詩全秩沉翫累日曰今
野乘v10示其詩擘一覧輙撮出余詩曰此詩今雖未孰他日必成大家文章吾詩集吾未選抄他日開板壽後須使此人㨂選尹月汀根壽問近世文章高下人言新進文士中柳某能文章甚高云其文與崔東臯岦孰優擘曰岦之文模倣古人之作雖工非自家造化若
野乘v10○叅議權擘一生攻詩詩鑑甚明凢見人詩文能見一便别都鄙百不一失或示徐益詩一見之曰此詩半鄕半京葢益本京人而娶妻礪山已數年矣其藻鑑多如此今有時習齋集十餘卷而子孫貧匱只刊一卷車滄
野乘v10疪病余求見之果然余年二十時上山寺讀書京都儒士未釋褐者多在焉今皆爲文人相與酬唱連章累篇或小詩或四䪨其時子鞈亦與唱和之列敀示其詩擘一覧輙撮出余詩曰此詩今雖未孰他日必成大家文章吾詩集吾未選抄他日開板壽後須使
國朝人物志v2權氏笑曰夫在妻焉往若賊手近衣裳死亦汚矣夫死於義妻死於節不亦可乎卽引刀自剄權氏習齋之女石洲韠之妹俄而賊至劫軫下拜軫不聽賊以劍刮剔足膝終不屈遇害雲衢大呼乞以身償
國朝人物志v2字汝章號石洲安東人習齋子爲人疏亢不羈少慕鄭澈風誼及澈謫江界時韠與李安訥往謁之澈大喜曰此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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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