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잠(張潛)
[요약정보]
| UCI | G002+AKS-KHF_12C7A5C7A0FFFFB1497X0 |
| 자(字) | 호원(浩源) |
| 호(號) | 죽정(竹亭) |
| 생년 | 1497(연산군 3) |
| 졸년 | 1552(명종 7) |
| 시대 | 조선전기 |
| 본관 | 인동(仁同) |
| 활동분야 | 학자 > 유생 |

| 부 | 장적손(張嫡孫) |
| 출신지 | 경상북도 구미(龜尾) 인동(仁同) |
| 저서 | 『죽정일고(竹亭逸稿)』 |

[상세내용]
장잠(張潛)
1497년(연산군 3) 6월 26일∼1552년(명종 7). 조선 전기 유학자. 자는 호원(浩源)이고, 호는 죽정(竹亭)이다. 본관은 인동(仁同)이고, 경상북도 구미(龜尾) 인동(仁同) 출신이다.
증조부는 장보(張俌)이며, 조부는 장맹저(張孟儲)이며, 부친은 장적손(張嫡孫)이다. 외조부는 화순최씨(和順崔氏) 최한충(崔漢忠)이고, 처부는 영일정씨(迎日鄭氏) 정호(鄭濩)이다.
조광조(趙光祖: 1482∼1519)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나 조광조가 죽음을 당한 후 은거하여 죽정정사(竹亭精舍)를 짓고 학문에 몰두하였다.
조광조 문하에 있을 때는 백인걸(白仁傑: 1497∼1579)‚ 성수침(成守琛: 1493∼1564) 등과 교유하였다. 은거 중에는 이언적(李彦迪: 1491∼1553)‚ 이황(李滉: 1501∼1570) 등이 찾아와 학문을 논하였다. 조광조의 신원에 힘써 서울로 올라가서 상소하는 등 평생 스승을 흠모하였다.
묘갈명(墓碣銘)은 족손(族孫)인 장현광(張顯光: 1554∼1637)이 지었다.
그를 추모하는 사람들이 1692년(숙종 18) 9월에 현암사우(賢巖祠宇)를 세웠다. 이 사당은 1761년(영조 37) 유림의 발의로 건물이 증축되고 현암서원(賢巖書院)으로 승호(陞號)되었다. 이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후 복원되지 않았으며, 현재의 경상북도 구미시 황상동(黃桑洞)에 옛 터가 있다.
그의 문집으로 『죽정일고(竹亭逸稿)』가 전해진다.
증조부는 장보(張俌)이며, 조부는 장맹저(張孟儲)이며, 부친은 장적손(張嫡孫)이다. 외조부는 화순최씨(和順崔氏) 최한충(崔漢忠)이고, 처부는 영일정씨(迎日鄭氏) 정호(鄭濩)이다.
조광조(趙光祖: 1482∼1519)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나 조광조가 죽음을 당한 후 은거하여 죽정정사(竹亭精舍)를 짓고 학문에 몰두하였다.
조광조 문하에 있을 때는 백인걸(白仁傑: 1497∼1579)‚ 성수침(成守琛: 1493∼1564) 등과 교유하였다. 은거 중에는 이언적(李彦迪: 1491∼1553)‚ 이황(李滉: 1501∼1570) 등이 찾아와 학문을 논하였다. 조광조의 신원에 힘써 서울로 올라가서 상소하는 등 평생 스승을 흠모하였다.
묘갈명(墓碣銘)은 족손(族孫)인 장현광(張顯光: 1554∼1637)이 지었다.
그를 추모하는 사람들이 1692년(숙종 18) 9월에 현암사우(賢巖祠宇)를 세웠다. 이 사당은 1761년(영조 37) 유림의 발의로 건물이 증축되고 현암서원(賢巖書院)으로 승호(陞號)되었다. 이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후 복원되지 않았으며, 현재의 경상북도 구미시 황상동(黃桑洞)에 옛 터가 있다.
그의 문집으로 『죽정일고(竹亭逸稿)』가 전해진다.
[참고문헌]
竹亭先生文集
규장각한국학연구원(http://kyujanggak.snu.ac.kr/)
규장각한국학연구원(http://kyujanggak.snu.ac.kr/)
[집필자]
김은영
| 수정일 | 수정내역 |
|---|---|
| 2009-09-30 | 2009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