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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걸(白仁傑)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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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사위(士偉)
호(號)휴암(休菴)
시호(諡號)문경(文敬)
생년1497(연산군 3)
졸년1579(선조 12)
시대조선전기
본관수원(水原)
활동분야학자 > 유생
백익견(白益堅)
저서『휴암집』

[상세내용]

백인걸(白仁傑)
1497년(연산군 3)∼1579년(선조 12). 조선 중기의 학자‧문신. 본관은 수원(水原). 자는 사위(士偉), 호는 휴암(休菴). 서울에 거주하였다.

왕자사부(王子師傅) 백익견(白益堅)의 아들이다.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이다. 김안국(金安國)에게서도 학문을 배웠다. 송인수(宋麟壽)유희춘(柳希春)이이(李珥)성혼(成渾) 등 당대의 사림계 인물들과 널리 교유하였다.

김식(金湜)성균관대사성이 되어 새로운 학풍이 일어나게 되자 구도(求道)의 뜻을 세워 학문에 전심하였으며, 특히 조광조를 존경하여 그의 집 옆에 집을 짓고 사사하였다.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비분강개하여 금강산에 들어가 지내다가 돌아와 1531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1537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러나 기묘사림의 일원으로 지목되어 오랫동안 성균관에 머물다가 이듬해에 예문관검열이 되었으며, 이때 예문관의 관리가 이조(吏曹)의 인사행정의 잘잘못을 기록하는 옛 관습을 복구하여 실행하였다.

예조좌랑을 거쳐 남평현감(南平縣監)이 되었는데 이때 근무를 성실히 하였으며, 특히 학당(學堂)을 세우고 학장(學長)을 두어 자제들의 교육에 힘쓴 공로로 품계가 높아졌다.

1541년 홍문록(弘文錄)에 올랐다.

1545년(인종 1) 지평을 거쳐 호조정랑이 되었으며, 춘추관기주관(春秋館記注官)을 겸하였다. 같은해 명종 즉위 후 윤원형(尹元衡) 등이 대비 문정왕후(文定王后)를 등에 업고 권력을 오로지할 목적으로 을사사화를 일으켜 윤임(尹任)유관(柳灌) 등을 제거할 때, 헌납으로 있으면서 대비 밀지(密旨)의 부당함을 들어 극력 반대하다가 대비의 명으로 파직되고 옥에 갇혔으나 정순붕(鄭順朋)최보한(崔輔漢) 등의 도움을 받고 풀려났다.

그뒤 1547년 문정왕후의 수렴청정과 이기(李芑) 등의 농권을 비난하는 양재(良才)의 벽서를 기화로 소윤(小尹)세력이 대윤(大尹)의 잔존세력과 사림계 인물들을 재차 축출할 때 연루되어 안변(安邊)에 유배당하였다.

1551년 사면되어 고향에 돌아간 뒤 『태극도설(太極圖說)』과 정주학(程朱學)의 서적들을 깊이 연구하였다.

1565년(명종 20) 윤원형이 몰락하자 승문원교리로 등용되어 이듬해 사도시첨정(司䆃寺僉正)선공감부정(繕工監副正)을 지냈다.

1567년 양주목사가 되었을 때는 공납의 폐단을 개혁하는 등의 치적을 쌓아 고을사람들이 기념비를 세웠다.

선조가 즉위한 뒤 1568년(선조 1) 기대승(奇大升)의 건의로 특별히 뽑혀 대사간에 임명되었다. 같은해 공조참의대사헌을 역임하고 뒤에 병조참판이 되었다. 이밖에 공조참판 등을 지냈다.

1568년 인순왕후(仁順王后)의 수렴청정에 반대하는 소를 올림으로써 오래지 않아 철렴(撤廉)하도록 하였다.

또한, 이해 이후 죽을 때까지 조광조를 문묘에 배향할 것을 여러 번 요청하였다.

그러나 선조선조가 그 아버지 덕흥군(德興君)을 추존하는 작업을 추진할 때에는 일반 신하들의 강력한 반대와는 달리 임금의 처지를 두둔하여 한때 사림들의 탄핵을 받고 지방으로 돌아갔다.

조정에 분당의 조짐이 나타나자 이준경(李浚慶)의 의견을 좇아 당론을 잠재우려는 노력을 기울였으나 이로 인하여 선비들을 해하려 한다는 당시 사림들의 의심을 사서 1571년 파주로 퇴거하였다.

그뒤 우참찬으로 징소되었으나 치도(治道)를 논하는 소를 올리고 나아가지 않았다.

1579년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 있으면서 이이(李珥)와 함께 다시 동서분당의 폐단을 논하고 진정시킬 것을 주장하였으나 서인(西人)을 편든다는 공격을 받았다.

그밖에도 국경의 상황을 논하여 군비를 닦을 것을 주장하는 등 국정에 대하여 많은 의견을 제시하였다.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명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선조초에는 많은 정치적 문제에 연관되었고 매우 연만하여 많은 시간을 파주에 퇴거하여 있었는데, 선조대사헌우참찬 등의 관직을 내려 부르거나 식량을 내리기도 하고, 1569년의 경우와 같이 직접 편지를 보내 부르는 파격적인 대우를 베풀기도 하였다.

나이가 든 뒤에도 성리학에 대한 탐구를 열심히 하였으며 이이성혼 등과 더불어 학문을 익히고 토론하였다. 기묘사화 후 명종대까지 계속되는 훈구세력의 발호에 맞서 사림파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하였으며, 특히 1545년 을사사화 때에는 일신을 돌보지 않고 윤원형의 음모에 대항한 것은 후대에 길이 칭송되었다.

선조 때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며 청백리에 뽑혔다. 인조충숙(忠肅)의 시호를 받았으나 뒤에 문경(文敬)으로 고쳐졌다. 파주파산서원(坡山書院)남평(南平)봉산서원(蓬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휴암집』이 전한다.

[참고문헌]

中宗實錄
仁宗實錄
宣祖實錄
明宗實錄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東儒師友錄
燃藜室記述

[집필자]

오수창(吳洙彰)

명 : "인걸(仁傑)"에 대한 용례

전거용례
國朝編年v08雖其言不少施而被罪罷卯亦足以裭群姦之魄壯正人之氣宇宙之間不可無此一擧張南軒謂朝銓封事可與日月爭光臣於仁傑是啓亦云○以李芑爲右相林百㱓爲吏判權撥爲兵判閔齊仁爲戶判許磁爲大司憲羅世纘爲大司諫○尹任等三人被竄事
國朝編年v10經筵日記○白仁傑欲上疏進保合東西之策疏在下方而恐其辭不達意通于李珥使修潤之珥依其言略爲一段文字以送之仁傑疎脫向人不謂正言宋應浻輕躁陰險窺珥上打破東西之疏忤於士類意謂若倡說劾珥則可以深結東人而得做好官乃議於
國朝編年v11之可疑而强以締結之名驅之於黨惡之域不亦異哉六七年前義謙隱微之罪未著故參贊白仁傑曾爲義謙所忤迫逐敀田而仁傑己卯之疏以目義謙爲小人恐其太過金宇顒輩當初立論亦以斥義謙爲小人爲不可此非黨比伸救之言誠以其惡未著而從
國朝編年v12仁傑之侄
紀年便攷v14仁傑旣退上思其風節下旨屢召仁傑辭以疾至是特命進秩為憲長
紀年便攷v14仁傑旣退上思其風節下旨屢召仁傑辭以疾至是特命進秩為憲長
紀年便攷v14文廟疏凢數千言 上優荅之令政院謄書一夲入內備覧焉○未幾李珥疏出而許曄李文馨徃見仁傑曰何與李珥疏相合邪仁傑曰出於珥手矣仁傑乃上疏自明曰李珥修潤臣疏矣宋之程頤代彭思永作候王典禮疏代富弼作永昭陵疏代呂公著作應詔
紀年便攷v14仁傑忠義之心白首不渝年踰大耋講學矻矻䖏家貧儉服食粗踈 上重其風節終始眷顧不衰也
紀年便攷v14上優荅之令政院謄書一夲入內備覧焉○未幾李珥疏出而許曄李文馨徃見仁傑曰何與李珥疏相合邪仁傑曰出於珥手矣仁傑乃上疏自明曰李珥修潤臣疏矣宋之程頤代彭思永作候王典禮疏代富弼作永昭陵疏代呂公著作應詔疏臣用珥文而不以
紀年便攷v14寅協㳟又言趙光祖宜從祀文廟疏凢數千言 上優荅之令政院謄書一夲入內備覧焉○未幾李珥疏出而許曄李文馨徃見仁傑曰何與李珥疏相合邪仁傑曰出於珥手矣仁傑乃上疏自明曰李珥修潤臣疏矣宋之程頤代彭思永作候王典禮疏代富弼作
紀年便攷v16慶出布衣破屦寒色蕭然而其容嚴重有不可犯者㘴而語無一點塵態渾甚悅既歸語白仁傑曰吾見某人還時忽覺清風滿袖仁傑大異之自是名播士林間性至孝以行誼薦授参奉不就連除守令不就屡空不以為意宣祖召拜持平又拜司畜乃一拜命再授
紀年便攷v16白惟讓水原人别提仁豪子仁傑従子 中宗庚寅生字仲謙號玉溪慈詳愷悌貌如玉人名重一時宣祖庚午生貟壬申以别提登親試歴南床翰林銓郞舎人典
紀年便攷v17白惟咸仁傑子明宗丙午生字仲悅號棠山成守琛門人宣祖庚午司馬丙子以參奉登明經科歴銓郞舎人官止承旨見朝著不靖退居龍安
國朝人物志v2字士偉號休菴水原人父師傅益堅娶司直丹陽禹從殷女生仁傑于漢師年八歲値燕山主荒淫毀撒民家中使見仁傑應對周旋如成人異之與言曰吾當免爾家不毀及稍
國朝人物志v2柳灌柳仁淑等獻納白仁傑啓曰閔齊仁金光準將論尹任臣以爲此事出於密旨不正甚矣初仁傑謂齊仁曰此事不可不爭齊仁曰正吾意也但以老母在耳及見仁傑啓歎曰誠確論也乙巳以勳封
國朝人物志v2其容嚴重有不可犯者坐而語無一點塵態渾甚悅旣退言于白仁傑曰吾見某人還時忽覺淸風滿袖矣仁傑大驚異之自此名播士林間癸酉以卓行薦除六品官不就辛巳拜持平亦不起己丑逆獄株連被逮旋放釋
國朝人物志v2景中字信民辛酉生員丁卯文科郡守國朝榜目白惟讓字仲謙水原人府使仁豪子仁傑侄庚午生員壬申文科副提學己丑獄起惟讓子壽民娶汝立兄汝興女惟讓及四子
國朝人物志v2字仲悅水原人仁傑子號棠谷庚午生員丙子文科李文成棄世朝著不靖惟咸去官退居龍仁田舍乘間往棲兜率山
國朝人物志v3字德老水原人忠肅公仁傑兄別提仁豪五世孫肅宗庚申武科歷宣傳官爲草溪郡守興學校爲南兵使繕治軍器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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