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치검색 표제어 전체
검색
임필형(任弼亨)

[요약정보]

UCIG002+AKS-KHF_13C784D544D615B1493X0
자(字)형지(亨之)
생년1493(성종 24)
졸년?(미상)
시대조선전기
본관풍천(豊川)
활동분야문신 > 문신
임유(任瀏)
조부임팽손(任彭孫)
증조부임복(任復)
외조부이비(李貔)

[상세내용]

임필형(任弼亨)
1493년(성종 24)∼미상.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형지(亨之). 임복(任復)의 증손으로, 조부는 한성판관 임팽손(任彭孫)이고, 부친은 훈련원부정 임유(任瀏)이며, 모친은 이비(李貔)의 딸이다.

1525년(중종 20)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534년(중종 39) 헌납이 되었으며, 헌납 재직중 원망의 말을 처사촌인 윤충원(尹忠元)에게 듣고 동료에게 발설하여 혐의를 받지 않기 위하여 윤충원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관직이 교체되면서 혐의를 추문당했다.

그러나 1537년(중종 32) 명나라의 사신이 오자 문례관(問禮官)으로 활동하였으며, 그 뒤 장령을 거쳐 김안로(金安老) 패사(敗死) 사건 발생 직후 사간에 제수(除授)되어 허항(許沆)채무택(蔡無擇) 등을 논죄할 때 참여한 것으로 가자(加資)되었다. 1543년(중종 38) 광주목사를 거쳐 제주목사로 승진하였으나, 여론이 좋지 않은 자를 당상관으로 승진시킬 수 없다는 언관의 반대로 좌절되었다.

그 뒤 1547년(명종 2) 여주목사가 되었으나 청탁에 의해 죄인의 허물을 들추어내는 것을 지체하였다는 것으로 관직이 교체되었다. 그러나 곧 다시 형조참의가 되었으며, 그 뒤 경주부윤예조참의를 역임하였다.

[참고문헌]

中宗實錄
明宗實錄
國朝榜目

[집필자]


수정일수정내역
2009-09-302009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