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보(尹碩輔)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724C11DBCF4D1505X0 |
자(字) | 자임(子任) |
생년 | ?(미상) |
졸년 | 1505(연산군 11) |
시대 | 조선전기 |
본관 | 칠원(漆原)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윤사(尹思) |

[상세내용]
윤석보(尹碩輔)
미상∼1505년(연산군 11).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칠원(漆原). 자는 자임(子任). 윤사(尹思)의 아들이다.
1462년(세조 8) 진사가 되고 1472년(성종 3)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그뒤 여러 관직을 거쳐 1480년 사간원정언이 되어 유자광(柳子光) 등과 파당을 만들어 횡포를 자행한 임사홍(任士洪)에게 극형에 처하지 않고 유배로써 그친 것을 비판하였다.
또 이듬해에는 의정부‧육조‧대간의 어느 곳에서도 천거를 받지 못한 신정(申瀞)이 평안도관찰사로 임명되자 이의 부당함을 상소하였다. 풍기군수‧성주목사 등 여러 곳의 수령을 거쳐 1495년(연산군 1) 사간이 되었고, 그뒤 홍문관직제학을 거쳐 1504년 대사간이 되었다. 이해에 갑자사화가 일어나는 등 실정을 거듭하는 연산군에게 충언을 하다가 유배되었으며 유배지에서 이듬해 죽었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출된 뒤 도승지에 추증되었다.
오랜 간관생활 중 직언을 잘 하였으며, 생전의 청렴결백한 공직생활로 1506년(중종 1) 염근리(廉謹吏)에, 선조 때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1462년(세조 8) 진사가 되고 1472년(성종 3)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그뒤 여러 관직을 거쳐 1480년 사간원정언이 되어 유자광(柳子光) 등과 파당을 만들어 횡포를 자행한 임사홍(任士洪)에게 극형에 처하지 않고 유배로써 그친 것을 비판하였다.
또 이듬해에는 의정부‧육조‧대간의 어느 곳에서도 천거를 받지 못한 신정(申瀞)이 평안도관찰사로 임명되자 이의 부당함을 상소하였다. 풍기군수‧성주목사 등 여러 곳의 수령을 거쳐 1495년(연산군 1) 사간이 되었고, 그뒤 홍문관직제학을 거쳐 1504년 대사간이 되었다. 이해에 갑자사화가 일어나는 등 실정을 거듭하는 연산군에게 충언을 하다가 유배되었으며 유배지에서 이듬해 죽었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출된 뒤 도승지에 추증되었다.
오랜 간관생활 중 직언을 잘 하였으며, 생전의 청렴결백한 공직생활로 1506년(중종 1) 염근리(廉謹吏)에, 선조 때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참고문헌]
成宗實錄
燕山君日記
國朝榜目
燃藜室記述
燕山君日記
國朝榜目
燃藜室記述
[집필자]
문수홍(文守弘)
명 : "석보(碩輔)"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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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