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용생(柳龍生)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720C6A9C0DDD1434X0 |
시호(諡號) | 양정(良靖) |
생년 | ?(미상) |
졸년 | 1434(세종 16) |
시대 | 조선전기 |
본관 | 진주(晉州[土])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유연(柳淵) |
[상세내용]
유용생(柳龍生)
미상∼1434년(세종 16). 고려말‧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晉州[土]).
문하찬성사 유연(柳淵)의 아들이다.
공민왕 때 궁중에서 자랐으며, 20세에 벼슬길에 올라 창왕 때에 문하부밀직사(門下府密直使)가 되었다.
1390년(공양왕 2)에는 판자혜부사(判慈惠府使)로, 이듬해에는 동북면도절제사가 되었다.
1392년 동북면도절제사 겸 화령부윤(和寧府尹)으로 있을 때 왜구를 포획하는 데 공이 컸다.
1401년(태종 1)에 중군총제가 되었고, 이듬해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04년 경상도도절제사 및 경상도병마절제사로 있을 때도 왜구퇴치에 큰 공을 세웠다.
1407년 공조판서‧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가 되었으며, 이듬해 성절사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09년 호조판서‧중군도총제 등을 역임하고, 형조판서가 되었다.
당시 민무구(閔無咎)‧무질(無疾)형제의 사건관련자를 국문할 때 형관으로서 엄하게 하지 않았다는 문책을 당하여 파직되어 외방(外方)으로 귀양갔다.
이듬해 과전(科田)은 환급받게 되었다. 성품이 너그러우면서 강직하였으며, 문관으로 무관도 겸하면서 특히 왜구퇴치에 큰 공을 세웠다. 시호는 양정(良靖)이다.
문하찬성사 유연(柳淵)의 아들이다.
공민왕 때 궁중에서 자랐으며, 20세에 벼슬길에 올라 창왕 때에 문하부밀직사(門下府密直使)가 되었다.
1390년(공양왕 2)에는 판자혜부사(判慈惠府使)로, 이듬해에는 동북면도절제사가 되었다.
1392년 동북면도절제사 겸 화령부윤(和寧府尹)으로 있을 때 왜구를 포획하는 데 공이 컸다.
1401년(태종 1)에 중군총제가 되었고, 이듬해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04년 경상도도절제사 및 경상도병마절제사로 있을 때도 왜구퇴치에 큰 공을 세웠다.
1407년 공조판서‧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가 되었으며, 이듬해 성절사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09년 호조판서‧중군도총제 등을 역임하고, 형조판서가 되었다.
당시 민무구(閔無咎)‧무질(無疾)형제의 사건관련자를 국문할 때 형관으로서 엄하게 하지 않았다는 문책을 당하여 파직되어 외방(外方)으로 귀양갔다.
이듬해 과전(科田)은 환급받게 되었다. 성품이 너그러우면서 강직하였으며, 문관으로 무관도 겸하면서 특히 왜구퇴치에 큰 공을 세웠다. 시호는 양정(良靖)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太宗實錄
世宗實錄
太宗實錄
世宗實錄
[집필자]
박정자(朴定子)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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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