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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세형(宋世珩)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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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헌숙(獻叔)
호(號)반곡(盤谷)
생년?(미상)
졸년1553(명종 8)
시대조선전기
본관여산(礪山)
활동분야문신 > 문신
송연손(宋演孫)
공신호추성위사보익공신(推誠衛社保翼功臣)

[상세내용]

송세형(宋世珩)
미상∼1553년(명종 8).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여산(礪山). 자는 헌숙(獻叔), 호는 반곡(盤谷).

부친은 군수 송연손(宋演孫)이며, 형은 교리 송세림(宋世琳)이다.

문장에 능하여 1524년(중종 19) 생원시에 합격하고, 이어서 성균관에서 수업하면서 진사시에도 합격하였다. 1528년 진사로서 사행무역(使行貿易)의 폐단 등 시폐(時弊)를 상소하여 거의 모두 채납시켰다. 1532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로 발탁되었으나, 김안로(金安老)일당에게 배척되어 크게 진출하지 못하였다. 중종이 잠저시(潛邸時) 그의 아버지 송연손중종의 사부(師傅)이었던 관계로 어려서 중종과 같이 지낼 때가 많았다. 뒤에 왕위에 오르자 중종이 이를 잊지 않고 자주 불러 안부를 물었는데, 김안로 일당은 그들의 간사한 행동의 정상이 상달될 것을 염려하여 모함하고 배척하였던 것이다.

1537년 김안로 일당이 몰려나자 비로소 중용되어 이듬해에 홍문관부수찬을 거쳐, 정언홍문관부교리지평헌납 등 삼사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고, 1542년 홍문관응교에 올랐다. 이때 이황(李滉)과 함께 조광조(趙光祖)의 신원을 청하였으나 실현되지 못하였다. 이듬해에 장령사간을 거쳐, 1544년 국왕의 특지로 이조참의에 제수되었다. 이어서 홍문관부제학을 거쳐, 인종이 즉위하자 승정원으로 자리를 옮겨 우부승지좌부승지를 역임하였다.

명종이 즉위하여 소윤일파가 득세하면서 을사사화를 일으키자, 이에 가담하여 추성위사보익공신(推誠衛社保翼功臣)에 책록되고 좌승지로 승진하였다. 이어서 예조참판으로 승진하고 호산군(壺山君)에 봉하여졌다. 1547년(명종 2) 외직으로 나가 전주부윤이 되었다가 이듬해에 내직으로 돌아와서 공조참판대사헌을 역임하였다. 아울러 동지의금부사를 겸하고, 곧이어 호조참판을 거쳐 호조판서가 되었다. 그 뒤 대사헌지중추부사를 역임하고, 1551년 다시 호조판서가 되었다. 두 차례에 걸쳐 호조판서를 역임하면서 국가재정을 절약하는 바 많았다. 이어서 그해에 이조판서가 되어 당시 문정왕후(文定王后)와 연결되어 불교세력의 강화를 꾀하고 있던 보우(普雨)의 불법함을 여러 차례 상소하고 탄핵하며 그를 주살할 것을 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조판서를 연임하던 중 병사하였다.

문장에 능하면서 행정능력도 있었는데, 특히 재정에 밝아 시폐를 개혁함에 힘썼다. 그러나 이기(李芑)임백령(林百齡) 등과 가까웠기 때문에 상황에 잘 따르고 권간(權姦)에게 아첨하기를 좋아하였다는 평을 들었다.

[참고문헌]

中宗實錄
仁宗實錄
明宗實錄
海東名臣錄
國朝榜目

[집필자]

최완기(崔完基)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