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준(朴永俊)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BC15C601C900B1510X0 |
자(字) | 언이(彦而) |
생년 | 1510(중종 5) |
졸년 | ?(미상) |
시대 | 조선전기 |
본관 | 고령(高靈)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박조(朴稠) |
[관련정보]
[상세내용]
박영준(朴永俊)
1510년(중종 5)∼미상.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언이(彦而). 박조(朴稠)의 아들이다.
일찍이 진사가 되고 1540년(중종 35)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46년(명종 1)에 부수찬(副修撰)이 된 뒤 병조좌랑(兵曹佐郞)‧호조정랑(戶曹正郞)‧사헌부헌납(司憲府獻納)‧홍문관교리‧병조정랑‧이조정랑 등 여러 관직을 거치는 동안 청렴결백하다 하여 1551년 염근리(廉謹吏)로 뽑혔다.
이어서 의정부사인(議政府舍人)‧사복시정(司僕寺正)‧홍문관직제학(弘文館直提學)‧병조참지(兵曹參知) 등을 거쳐, 1555년 충청도관찰사가 된 뒤 동부승지(同副承旨)‧우부승지(右副承旨)‧우승지(右承旨) 등을 역임하였다.
1557년 공조참판(工曹參判)에 이어 황해도관찰사로 다녀와 이듬해 대사간(大司諫)이 되어 명나라의 사신에 대한 접대 등 조폐로 황해도 일대에 피역자(避役者)가 많고 관속(官屬)들마저 유리되고 있는 실정임을 들어 그 대책의 시급함을 간하였다.
1559년 대사헌이 되고 이어서 홍문관부제학‧대사성‧이조참판‧예조참판을 거쳐, 1563년에 다시 대사간이 되어 매관육작(賣官鬻爵)에 눈이 어두운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원계검(元繼儉)의 파직을 상소하였다.
이듬해 형조판서에 오른 뒤 예조판서‧금부당상‧지중추부사‧공조판서를 거쳐, 1567년 이조판서가 되고 이듬해 진하 겸 태자책봉사(進賀兼太子冊封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71년(선조 4) 병조판서가 되고 이어서 지경연(知經筵)‧예조판서‧공조판서‧형조판서‧이조판서를 번갈아 가면서 역임하다, 1575년 좌찬성(左贊成)에 올랐다.
일찍이 진사가 되고 1540년(중종 35)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46년(명종 1)에 부수찬(副修撰)이 된 뒤 병조좌랑(兵曹佐郞)‧호조정랑(戶曹正郞)‧사헌부헌납(司憲府獻納)‧홍문관교리‧병조정랑‧이조정랑 등 여러 관직을 거치는 동안 청렴결백하다 하여 1551년 염근리(廉謹吏)로 뽑혔다.
이어서 의정부사인(議政府舍人)‧사복시정(司僕寺正)‧홍문관직제학(弘文館直提學)‧병조참지(兵曹參知) 등을 거쳐, 1555년 충청도관찰사가 된 뒤 동부승지(同副承旨)‧우부승지(右副承旨)‧우승지(右承旨) 등을 역임하였다.
1557년 공조참판(工曹參判)에 이어 황해도관찰사로 다녀와 이듬해 대사간(大司諫)이 되어 명나라의 사신에 대한 접대 등 조폐로 황해도 일대에 피역자(避役者)가 많고 관속(官屬)들마저 유리되고 있는 실정임을 들어 그 대책의 시급함을 간하였다.
1559년 대사헌이 되고 이어서 홍문관부제학‧대사성‧이조참판‧예조참판을 거쳐, 1563년에 다시 대사간이 되어 매관육작(賣官鬻爵)에 눈이 어두운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원계검(元繼儉)의 파직을 상소하였다.
이듬해 형조판서에 오른 뒤 예조판서‧금부당상‧지중추부사‧공조판서를 거쳐, 1567년 이조판서가 되고 이듬해 진하 겸 태자책봉사(進賀兼太子冊封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71년(선조 4) 병조판서가 되고 이어서 지경연(知經筵)‧예조판서‧공조판서‧형조판서‧이조판서를 번갈아 가면서 역임하다, 1575년 좌찬성(左贊成)에 올랐다.
[참고문헌]
明宗實錄
宣祖實錄
國朝榜目
燃藜室記述
宣祖實錄
國朝榜目
燃藜室記述
[집필자]
문수홍(文守弘)
명 : "영준(永俊)"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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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