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형수(林亨秀)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784D615C218B1514X0 |
자(字) | 사수(士遂) |
호(號) | 금호(錦湖) |
생년 | 1514(중종 9) |
졸년 | 1547(명종 2) |
시대 | 조선전기 |
본관 | 평택(平澤)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임준(林畯) |
외조부 | 권석(權錫) |
출생지 | 나주 |
저서 | 『금호유고』 |
[관련정보]
[상세내용]
임형수(林亨秀)
1514년(중종 9)(주1)
∼1547년(명종 2).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평택(平澤). 자는 사수(士遂), 호는 금호(錦湖). 나주 출생. 부친은 북병사 임준(林畯)이며, 모친은 안동권씨로 현감 권석(權錫)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성격이 강직하였다.
1531년(중종 26)에 진사가 되고, 1535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주서‧기사관‧사서 등을 지내고, 사가독서(賜暇讀書)한 뒤 설서‧수찬‧회령판관‧전한 등을 거쳐 부제학에 승진되었다.
1545년 명종이 즉위하자 을사사화가 일어나면서 제주목사로 쫓겨났다가 파면되었다.
1547년(명종 2) 양재역(良才驛) 벽서사건이 일어나자, 소윤 윤원형(尹元衡)에게 대윤 윤임(尹任)의 일파로 몰려 절도안치(絶島安置)된 뒤 곧 사사되었다.
생전에 호당(湖堂)에서 함께 공부하였던 이황(李滉)‧김인후(金麟厚) 등과 친교를 맺고 학문과 덕행을 닦았다.
문장에도 뛰어나 많은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 뒤에 신원되었고, 1702년(숙종 28) 나주의 송재사(松齋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금호유고』가 있다.
생년 |
본인의 문과방목을 참고하여 생년을 1504년(갑자)에서 1514년(갑술)로 수정함. |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성격이 강직하였다.
1531년(중종 26)에 진사가 되고, 1535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주서‧기사관‧사서 등을 지내고, 사가독서(賜暇讀書)한 뒤 설서‧수찬‧회령판관‧전한 등을 거쳐 부제학에 승진되었다.
1545년 명종이 즉위하자 을사사화가 일어나면서 제주목사로 쫓겨났다가 파면되었다.
1547년(명종 2) 양재역(良才驛) 벽서사건이 일어나자, 소윤 윤원형(尹元衡)에게 대윤 윤임(尹任)의 일파로 몰려 절도안치(絶島安置)된 뒤 곧 사사되었다.
생전에 호당(湖堂)에서 함께 공부하였던 이황(李滉)‧김인후(金麟厚) 등과 친교를 맺고 학문과 덕행을 닦았다.
문장에도 뛰어나 많은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 뒤에 신원되었고, 1702년(숙종 28) 나주의 송재사(松齋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금호유고』가 있다.
[참고문헌]
中宗實錄
明宗實錄
國朝名臣錄
乙巳錄
錦湖遺稿
文谷集
白洲集
明宗實錄
國朝名臣錄
乙巳錄
錦湖遺稿
文谷集
白洲集
[집필자]
박석무(朴錫茂)
명 : "형수(亨秀)"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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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