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윤(金弘胤)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AE40D64DC724B1499X0 |
자(字) | 의중(毅仲) |
생년 | 1499(연산군 5) |
졸년 | 1569(선조 2) |
시대 | 조선전기 |
본관 | 광산(光山)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김극픽(金克愊) |
[관련정보]
[상세내용]
김홍윤(金弘胤)
1499년(연산군 5)∼1569년(선조 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의중(毅仲).
부친은 좌찬성 김극픽(金克愊)이다.
1522년(중종 17) 생원‧진사 양시에 합격하고, 1526년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 성균관전적이 된 뒤 사서(司書)‧병조좌랑‧이조좌랑을 거쳐 1528년 검토관(檢討官)이 되었으며, 이어서 병조정랑‧수찬 등을 역임하였다.
1530년 그의 아버지가 시사(時事)를 극언하여 조정에서 미움을 받아 자제가 모두 벼슬에서 쫓겨났다.
1533년 다시 전적에 기용되었으나 반대자들의 질시를 받자 자진하여 양구현감이 되었다.
1537년 다시 내직으로 올라와 예조정랑‧교감(校勘)‧사성(司成) 등을 거치고 1545년(명종 즉위) 강원도관찰사가 되었으며, 이듬해 호조참의가 된 뒤 동부승지‧우승지‧장례원판결사(掌隷院判決事)‧병조참의 등을 지냈다.
1561년 대사헌이 되고 이어 우윤(右尹)을 거쳐 경기관찰사에 이르렀다.
성품이 강직하여 권귀(權貴)들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대사헌으로 있을 때는 권세를 믿고 날뛰는 자들을 탄핵하다가 오히려 파직당하기도 하였다.
부친은 좌찬성 김극픽(金克愊)이다.
1522년(중종 17) 생원‧진사 양시에 합격하고, 1526년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 성균관전적이 된 뒤 사서(司書)‧병조좌랑‧이조좌랑을 거쳐 1528년 검토관(檢討官)이 되었으며, 이어서 병조정랑‧수찬 등을 역임하였다.
1530년 그의 아버지가 시사(時事)를 극언하여 조정에서 미움을 받아 자제가 모두 벼슬에서 쫓겨났다.
1533년 다시 전적에 기용되었으나 반대자들의 질시를 받자 자진하여 양구현감이 되었다.
1537년 다시 내직으로 올라와 예조정랑‧교감(校勘)‧사성(司成) 등을 거치고 1545년(명종 즉위) 강원도관찰사가 되었으며, 이듬해 호조참의가 된 뒤 동부승지‧우승지‧장례원판결사(掌隷院判決事)‧병조참의 등을 지냈다.
1561년 대사헌이 되고 이어 우윤(右尹)을 거쳐 경기관찰사에 이르렀다.
성품이 강직하여 권귀(權貴)들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대사헌으로 있을 때는 권세를 믿고 날뛰는 자들을 탄핵하다가 오히려 파직당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中宗實錄
明宗實錄
國朝人物考
國朝榜目
明宗實錄
國朝人物考
國朝榜目
[집필자]
이태진(李泰鎭)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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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