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응정(權應挺)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AD8CC751C815B1498X0 |
자(字) | 사우(士遇) |
호(號) | 묵암(黙菴) |
생년 | 1498(연산군 4) |
졸년 | 1564(명종 19) |
시대 | 조선전기 |
본관 | 안동(安東)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권희맹(權希孟) |
[관련정보]
[상세내용]
권응정(權應挺)
1498년(연산군 4)∼1564년(명종 1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사우(士遇), 호는 묵암(黙菴).
부친은 관찰사 권희맹(權希孟)이다.
1522년(중종 17) 사마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수학, 1528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권지정자(承文院權知正字)가 된 뒤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 등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지내고 황해도관찰사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냈다.
1547년(명종 2) 우윤(右尹)으로 재직중, 여자임금이 정권을 잡고 이기(李芑) 등이 권력을 농단하니 나라가 망할 것을 서서 기다리는 격이라는 내용의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이 일어나자, 이기 등에 의하여 봉성군(鳳城君) 이완(李岏)‧송인수(宋麟壽)‧이약해(李若海)‧이언적(李彦迪)‧노수신(盧守愼)‧유희춘(柳希春)‧백인걸(白麟傑) 등과 함께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어 강진으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단천(端川)‧문의(文義) 등지로 이배되었다.
1553년에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에 돌아갔다가 1557년에 다시 경주부윤에 기용되었으며, 그뒤 안동부사를 거쳐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부친은 관찰사 권희맹(權希孟)이다.
1522년(중종 17) 사마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수학, 1528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권지정자(承文院權知正字)가 된 뒤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 등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지내고 황해도관찰사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냈다.
1547년(명종 2) 우윤(右尹)으로 재직중, 여자임금이 정권을 잡고 이기(李芑) 등이 권력을 농단하니 나라가 망할 것을 서서 기다리는 격이라는 내용의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이 일어나자, 이기 등에 의하여 봉성군(鳳城君) 이완(李岏)‧송인수(宋麟壽)‧이약해(李若海)‧이언적(李彦迪)‧노수신(盧守愼)‧유희춘(柳希春)‧백인걸(白麟傑) 등과 함께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어 강진으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단천(端川)‧문의(文義) 등지로 이배되었다.
1553년에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에 돌아갔다가 1557년에 다시 경주부윤에 기용되었으며, 그뒤 안동부사를 거쳐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참고문헌]
明宗實錄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國朝榜目
[집필자]
차용걸(車勇杰)
명 : "응정(應挺)"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
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