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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극성(金克成)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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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성지(成之)
호(號)우정(憂亭)
시호(諡號)충정(忠貞)
생년1474(성종 5)
졸년1540(중종 35)
시대조선전기
본관광산(光山)
활동분야문신 > 문신
김맹권(金孟權)
저서『우정집』
공신호분의정국공신(奮義靖國功臣)

[상세내용]

김극성(金克成)
1474년(성종 5)∼1540년(중종 3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성지(成之), 호는 청라(靑蘿)우정(憂亭).

부친은 진사 김맹권(金孟權)이다.

1496년(연산군 2) 사마시에 장원하고, 1498년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 전적에 임명되어 종학사회(宗學司誨)를 겸하였다.

1500년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북평사(北評事)가 되었다. 얼마 뒤 헌납에 발탁되었으나 연산군에게 충심으로 간하다가 죄를 입을 뻔하였고, 이어 병조정랑사인(舍人) 등을 역임하였다.

1506년 중종반정에 가담, 분의정국공신(奮義靖國功臣)4등에 녹훈되어 장악원정(掌樂院正)으로 임명되고, 이듬해 부모봉양을 위해 외직을 빌려 서천군수로 부임하였다.

이어 장례원판결사(掌隷院判決事)병조참의를 역임하고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에 책봉되었다. 의주목사로 갔다가 1518년(중종 13) 삼공(三公)에 문무겸비의 인물로 천거되어 예조참판으로 전임되었다.

다시 경상우병사경상도관찰사를 역임하고, 이듬해 공조참판으로 정조사(正朝使)에 임명되어 북경을 다녀왔다. 대사헌을 거쳐 1523년 예조판서우참찬이조판서를 지내다가 잠시 평안도관찰사가 되었다.

다시 찬성‧병조판서 겸 지경연 세자이사로 있다가, 권신 김안로(金安老)의 미움을 받아 그 일파의 모함으로 정광필(鄭光弼)과 함께 흥덕(興德)에 유배되었다.

1537년 김안로가 패사(敗死)함에 귀양에서 풀려 우의정에 발탁되었다. 비교적 한미한 집안출신으로서 매사에 신중하고 자세하였으며, 전후 세번이나 예조판서를 지낼 만큼 문학에 뛰어났고 간결하다는 평을 들었다.

그러나 당시 사림과의 관계는 원만하지 못하였다.

저서로 『우정집』이 있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참고문헌]

中宗實錄
月沙集(李廷龜)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憂亭集

[집필자]

정만조(鄭萬祚)

명 : "극성(克成)"에 대한 용례

전거용례
國朝編年v06姜洪李抹曰姜洪汝父無罪被殺矣汝等乃史官也當以吾言特書可也杖十餘下但慟哭而已元宗曰眞狂病人止之論功貞袞克成加資崇祖以曾知其謀而不卽告之杖流○冊尹氏爲妃章敬王后○印頒三綱行實○盧永孫誣告李顆等謀逆得參勳後因臺
國朝編年v07淹以邊閫不能一日閑於經䌂蓋克成之經綸才略已自有廊廟之具朝家之所以待之者不淺西急虜則西南急倭則南典禮非克成不可三爲宗伯衡人物掌邦政非克成不可長兩銓旣出而復入纔入而復出國家以克成輕重者殆三十年矣丁酉上誅流權倖
紀年便攷v10竄元老無何大司憲梁淵䓁上䟽請斬安老沆洽無擇䓁於是發率圍捕并命遠竄未到配賜死于振威沆洽無擇并賜死釋光弼克成元老䓁荇在謫已殁命復其官
國朝人物志v1討倭過保寧郡樂其土因家焉父孟權中進士文宗末年召對嘉賞選置泮宮尋謝科業退老林泉克成神姿淸秀器宇寬弘年二十三壯元進士二十五壯元文科以書狀赴燕京還授北評事朝廷
國朝人物志v2聖庚午進士丁丑文科府使三兄弟登第同上金泰廷字亨彥光州人郡守伯幹子右相克成從曾孫辛酉進士己巳文科觀察使游退溪李滉門下有答問禮書同上金大鳴字聲遠號白巖蔚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