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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근(文瑾)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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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사휘(士輝)
호(號)쌍괴(雙槐)
생년1471(성종 2)
졸년?(미상)
시대조선전기
본관감천(甘泉)
활동분야문신 > 문신
문걸(文傑)
출신지영남

[상세내용]

문근(文瑾)
1471년(성종 2)∼미상. 조선 전기의 문신. 영남 출신의 사림파. 본관은 감천(甘泉). 자는 사휘(士輝), 호는 쌍괴(雙槐). 부사 문걸(文傑)의 아들이며 문관(文瓘)의 형이다.

1492년(성종 23) 사마시에 합격하고, 1496년(연산군 2)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예문관검열에 보임되어 춘추관기사관을 겸하여 『성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승정원주서, 예조병조이조좌랑, 헌납을 역임하였고, 김해부사수원부사금산군수 등의 외직을 지냈다.

1514년(중종 9)부터 사간대사간 등을 역임하면서 노산군연산군의 입후(立後)문제, 내수사장리(內需司長利)의 혁파와 같은 개혁을 주청하는 등 조광조(趙光祖) 등과 함께 훈구파와 맞서서 적극적인 언론활동을 전개하였다.

1516년 동부승지를 거쳐 이듬해 도승지가 되었으며, 중종의 총애를 받아 형조참판으로 승진되었으나, 남곤(南袞)심정(沈貞) 등의 무고로 경상도관찰사로 전직되었다.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조광조의 처형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파직되었다.

1521년 다시 참판으로 기용되었으나, 안처겸(安處謙)의 옥사(獄事)에 연루되어 도의(道義)를 가장하여 이름을 도둑질하였다는 죄목으로 관직을 삭탈당하고 용인에서 살다가 죽었다.

그는 같은 영남 출신인 권벌(權橃) 등과 함께 조광조 등 기호사림파와 연결되어 훈구파와 사림파 사이를 조제(調劑)하는 완충작용을 하였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용궁기천정사(箕川精舍)에 제향되었다.

[참고문헌]

燕山君日記
中宗實錄
國朝人物考
大東野乘
燃藜室記述
國朝榜目

[집필자]

이병휴(李秉烋)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