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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징(姜澂)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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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언심(彦深)
생년1466(세조 12)
졸년1536(중종 31)
시대조선전기
본관진주(晉州)
활동분야문신 > 문신
강이행(姜利行)

[상세내용]

강징(姜澂)
1466년(세조 12)∼1536년(중종 31). 조선시대의 문신‧서예가.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언심(彦深). 강이행(姜利行)의 아들이다.

약관으로 사마시에 합격하고, 1494년(성종 25)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해에 승문원권지(承文院權知)로 보임되고, 다시 예문관검열홍문관저작이 되었으며, 이어서 부수찬 등을 거쳐 부응교로 승진되었다. 연산군경연관(經筵官)으로 8년 동안 재직하였다.

강학을 할 때는 말이 유창하고 뜻이 깊어 좌우 신하들이 모두 경청하였다. 경연관으로 있을 때 충청도에 있는 요승(妖僧)이 스스로 사람들의 마비된 수족을 요술로 고친다 하면서 백성들을 현혹하므로, 왕명에 따라 그 요승을 문초하여 요망스러운 실정을 밝힌 바 있다. 돌아와서 장령이 되었다가 다시 직제학부제학 등을 거쳐 좌부승지가 되었다.

1504년(연산군 10)에 왕에게 수렵을 삼가도록 간하였다가, 연산군의 노여움을 사서 낙안(樂安)에 유배되었다.

1506년 유배지에서 복세암(福世庵)을 뜯어옮기는 것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잡혀와 옥에 갇혔으나, 그해에 일어난 중종반정으로 풀려나서 강원도관찰사가 되었다.

이듬해에 동지중추부사가 되었으며, 성절사(聖節使)로 임명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부모봉양을 위해 전주부윤을 자청하여 나가 선정을 베풀었다.

1521년(중종 16) 진하사(進賀使)명나라에 갔을 때 황제가 뛰어난 글씨솜씨에 감탄하여 특별한 대우를 하였다. 돌아와서 지중추부사경주부윤을 거쳐 예조참판이 되었다.

글씨를 잘 써서 중종의 총애를 받았다. 중종은 그를 시켜 옛 명현들의 명언과 시문을 쓰게 하여 홍문관에 걸어놓고 선비들과 백관들이 처신의 거울로 삼도록 하였다. 필법은 당대에 으뜸이었다 한다.

글씨로는 「정익혜공난종신도비(鄭翼惠公蘭宗神道碑)」‧「예조참의최한정비(禮曹參議崔漢楨碑)」가 있다.

[참고문헌]

國朝人物考
國朝榜目
槿域書畵徵

[집필자]

이재범(李在範)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